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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 그리고 반도체 동맹

책 '칩 워(Chip War)'를 읽고

by Book끄적쟁이

1. 반도체, 새로운 군사 동맹의 지형


한국에서 대만, 필리핀에서 싱가포르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지도 위에 놓고 보면, 마치 아시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를 보는 것만 같다. 이 겹쳐진 지도는 우연이 아니다. 냉전 이후 군사동맹의 경계는 군함과 전투기가 아니라 실리콘 웨이퍼의 궤적으로 옮겨갔다. 과거에는 항모가 패권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나노미터 단위의 회로가 세계 질서를 결정한다. 전쟁은 더 이상 총성이 아니라 칩의 흐름으로 벌어진다.


2. 중국, 기술의 사슬을 끊으려는 제국


중국은 20세기 후반, 스스로를 자급자족의 국가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스마트폰, 미사일, 슈퍼컴퓨터, AI까지—모두 외국 반도체 위에서만 작동했다. 베이징은 마침내 깨달았다. “21세기의 석유는 반도체이며, 그 석유는 적의 손에 있다.” 중국은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내세워 반도체 자립을 선언했다. SMIC, YMTC, CXMT 등 국유기업에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기술 장비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반도체는 실리콘 덩어리가 아니다. EDA 소프트웨어(미국), 극자외선 노광장비(네덜란드), 포토레지스트(일본), 테스트 공정(대만)— 이 복잡한 체인이 완벽히 맞물려야 비로소 하나의 칩이 태어난다. 중국의 ‘자립’은 이 구조 자체를 뒤집는 것이었지만, 결국 미국의 ‘칩스법’(CHIPS Act)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혔다. 그리하여 베이징의 전략은 바뀌었다. “자급은 어렵다. 그렇다면 통제하자.” 남중국해를 넘어 대만을 압박하고, TSMC를 지배하려는 계산이 여기서 출발한다. TSMC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세계 디지털 경제의 관문이다. 그 관문을 쥐는 순간, 중국은 실리콘을 통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


3. 미국,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다


미국은 화웨이 제재를 통해 기술 봉쇄의 첫 포문을 열었다. 그다음 단계는 ‘반도체 나토’였다. 미국, 일본, 한국, 대만, 네덜란드— 이 다섯 나라가 사실상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 미국은 이들 국가를 경제 동맹으로 묶고, ‘안보’의 이름으로 기술 공유를 통제했다. 대만은 로직 칩(연산), 한국은 메모리 칩(기억), 일본은 소재·장비, 네덜란드는 노광기, 미국은 설계·소프트웨어를 담당한다. 이 구조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지정학적 인질구조이기도 하다. 미국이 “이 회로망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유 시장의 보호’가 아니라 ‘기술 질서의 재편’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를 ‘실리콘 봉쇄망’이라 부르고, 미국은 ‘자유 진영의 공급망’이라 부른다. 이 두 단어의 온도 차이 속에 냉전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4. 한국, 기술 동맹 속의 딜레마


대한민국은 반도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라다. 수출의 20% 이상, 국가 성장의 절반이 이 산업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생명줄의 3분의 2가 중국 시장을 향한다. 미국의 동맹으로 남느냐, 중국의 시장을 지키느냐— 이건 경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한국은 세계 메모리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지만, AI 시대의 패권은 ‘기억’이 아니라 ‘생각하는 칩’, 즉 로직에 있다. 그렇기에 삼성과 SK가 미국에 공장을 세우는 일은 단순한 수출 전략이 아니라 생존 보험이다. 하지만 이 보험에는 조건이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대신 기술의 독립성을 일부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의 보호 아래 머물며 동시에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는 것이다.


5. 반도체의 지정학 ― 실리콘 냉전의 본질


반도체 산업의 지도를 다시 펴보면, 그건 곧 새로운 냉전의 전선이다. 대만 해협, 한국 남해, 일본 규슈, 네덜란드 브레다—이 모든 지점이 하나의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회로의 중앙에 미국이 앉아 있다. 이 회로가 끊기면, 전 세계는 암흑으로 빠진다. 중국은 이를 알기에, 무력으로 회로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내부로부터 기술을 복제하려 한다. 그러나 기술은 단순한 청사진이 아니다. TSMC의 수율, 인텔의 아키텍처, ASML의 정밀광학은 오랜 시간의 시행착오와 신뢰, 데이터, 그리고 사람들의 축적이 만든 결과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문명 자본이다.


6. 결론 ― 반도체 동맹의 미래, 그리고 한국의 선택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지금 실리콘 동맹의 중심이자, 가장 위험한 교차점에 서 있다. 미국은 기술을 요구하고, 중국은 시장을 요구한다. 이 두 힘의 교차로에서 한국이 살아남는 길은 단 하나, ‘기술 주권’이다. 정부는 보조금을 논하기 전에, 국가의 전략 기술을 자립시킬 R&D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은 단기 이익보다 장기 기술 우위를 지켜야 하고, 국민은 반도체를 단순한 수출품이 아닌 국가 안보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반도체는 더 이상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총성이 없는 전쟁의 무기이자, 국가 간 신뢰를 시험하는 리트머스다. 21세기의 패권은 실리콘 위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실리콘의 한가운데, 대한민국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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