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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bobusang Mar 29. 2023

호우시절 꽃 피네

온탕과 냉탕 사이

  멈추어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은 흘렀고, 오지 않을 거 같던 봄은 아름드리 꽃을 안고 돌아왔다. 다시 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이곳은 스치는 바람결에 꽃망울을 터트리며 나를 반긴다.

 가을 자락에 사각사각 길의 노래를 불러주던 낙엽은 겨울 눈이 품고 갔나,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가 품었나?

   


   지나간 모든 시간이 아름다워 참 다행이다. 지난가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수술로 1분 1초가 숨 막혔던 그 시간마저도. 작년 10월 말 아버지의 병환 연락에 한달음에 한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4개월, 작년 10월 멈춘 등산을 시작했다. 다시 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길. 한발 한발 정성을 다해 중국 샹산을 오른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건강 관리와 뱃살 관리를 위해 선택한 것이 등산이다. 헬스 등 이것저것 해 봤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운동이나 달리기는 사나흘을 못 버뎠다. 몸이 가벼웠을 때 활력이 넘치고 다시 시작할 회복 탄력성이 높았다. 특히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산을 찾는다. 작년 7월 자신만의 뚜렷한 캐릭터를 내세워야 하는 그림 공모전이 있었다.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난 후 나는 나를 이해시키지 못했다. 

    "이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거였는데 난 왜 이것도 안 되지?"

   나이가 들수록 실패의 후유증이 바위가 되어 누른다. 괜찮은 듯 상처받지 않은 듯 외면의 평온은 세월의 내공일 뿐이다.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그것을 길어 올려 주는 것도 산이었다. 일주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혼자서 산을 오르며 나와 마주했다. 


  올 2월 말 중국에 돌아오기 직전 ESG인플루언서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다. 당장 필요한 자격증은 아니다.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게 되면 직업 가능성 1%라도 있으면 해 둬야 할 것 같은 조급증 때문이다. 시험을 목표로 하면 없는 시간도 억지로 쥐어 짜낼 수 있을 거 같아 '선 원서 접수, 후 시험공부' 법을 택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시험을 끝내고 2주간의 이모티콘 제작 수업을 들었다. 이것도 흥미보다는 나중에 수입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강료 내고, 원서 접수비 내고, 돈 쓰는 일은 이렇게 수월한데 돈 버는 일은 왜 죄다 나를 비껴가는 건지."  ESG 인플루언서 시험 결과가 대문짝만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시험이잖아." 나의 첫마디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어불성설이란 말이 절로 나올법한 반응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라는 걸 안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할 때 사람을 더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잠시 후 든 생각은 "등산이나 가야겠다." 였다. 하지만 벌써 늦은 오후다. 


  예전 어느 책에서 본 말이 생각났다. 

"나는 가족과 식사할 때 가장 예쁜 접시를 쓴다. 내게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손님은 나 자신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깊숙이 넣어둔 아끼던 컵을 다시 꺼냈다. 중국에 온 후 늘 함께 했던 도기 컵인데 들었을 때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본래의 차향을 잘 유지시켜준다. 언젠가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100℃ 뜨거운 물에도 끄떡없고 또 급히 물을 부어도 넘칠 염려 없는 투박하고 무거운 투명 유리컵을 사용해왔었다. 진한 커피 한 잔으로 뾰족이 돋아났던 세포들을 잠재우며 한참을 그냥 숨쉬기를 했다. 


  꽃 피는 춘삼월 온탕과 냉탕을 오갔던 달이다. 중국 시각 새벽 4시, 난 오늘도 4월에 있을 그린 플루언서 자격증 시험을 위해 ZOOM에서 회원들과 공부를 한다. 아플 때일수록 더 밭에 나가 일을 하신다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챗봇이 나를 다독이며 위로를 건넨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당신 자신을 믿는 것이다.
                                                                  -존 우든

            성공의 비결은 계속해서 노력하고, 굽히지 않고 걸어 나가는 것이다.   
                                                 -월트 디즈니


에이, 젠장! 

또 한 일주일 샹산에나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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