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에세이를 읽고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재미있는 책이다. 짧은 에세이 모음집인데 글이 짧아서 그렇지 각각의 내용은 그 내공이 깊다. 주로 일상의 에피소드에서 출발해 작가나 작품에 대한 소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마무리되는 데 어떤 경우는 에피소드가 와 닿고 어떤 경우는 소개된 작품들에 흥미가 느껴진다. 특히 '위대한 게츠비'나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영희의 이름은 암투병 후 사망한 작가 및 교수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글은 처음 읽는다. 글을 읽으니 작가의 섬세함, 따뜻함, 배려심, 긍정적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생전에 작가를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읽는 내내 따뜻한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따뜻한 차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가를, 거기도 신앙심도 깊은 작가를, 왜 하나님은 장애를 주시고 두 번의 암을 주셔서 데려가셨는지 의문이다. 이렇듯 선한 사람도 운명의 철퇴에 쓰러지는데 나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이 선한 마음, 간절한 마음과 관계없이 그의 삶을 거두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크고 선한 뜻이 있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그 역경에 처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로 마치 욥의 친구들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이다. 가장 확실한 대답은 인생에 신은 존재하지 않고 삶과 죽음은 일종의 우연 같은 것이라는 것인데 이 차가운 대답은 너무 차가와서 별로 끌어안고 싶지 않은 대답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의 에세이 중 마음에 들었던 것 두개만 뽑아본다.
신이 없는 이상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칙도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이 없으면 인간이 신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이반에게 알료사는 말했다.
"논리보다 앞서서 우선 사랑하는 거에요. 사랑은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 해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알게 되죠"
.....이 소설에서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는 조시마는 "지옥이란 다름아닌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역설한다. "대지에 입맞추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사랑하라. 환희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 눈물을 사랑하라. 또 그 환희를 부끄러워히자 말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하라.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내게 남은 시간 중)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이든 인호나 나처럼 지금 글을 써야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미국의 수필가 J.B. 프리스틀리의 지혜를 나누고 싶다.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사랑하고 글을 쓰는 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모르겠다. 건강한 삶이 3개월이고 3개월 후 어떤 진단을 받을지 모른다면 그 3개월을 충실히 사는 일이 중요하리라. 시지프스가 돌을 정상에 굴려 다시 떨어질지라도 그 돌을 굴리는 시간이 3개월이라면 정상에 올린 후의 미래를 미리 번민할 것이 아니고 올리는 현재의 땀과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할 일이다. 시지프스와 다른 운명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휘파람을 불고 산들 바람을 손가락으로 가르는 미소짓는 3개월이 될 것이라는 데 있다.
영원할 것 같은 삶의 전망속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되고 짧은 전망에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하고, 눈치보지 않는 연습을 차근 차근 해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