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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촉 Nov 20. 2024

선택적 MZ의 탄생

제가 MZ라서요

젊은 꼰대의 선택적 MZ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회사 일이 일상의 80%가 되어버리는 나는 책임감이 지나친 편이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처음 근무했던 부서에 너무 어르신이 많았던 탓인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늘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고, 주변의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괜히 눈치를 보다가 퇴근을 못하거나, 당연히 써야 할 휴가를 팀 분위기를 보느라 쓰지 못하기 일쑤였고, 당연히 해야 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꽤 꼰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자주 있었다. 혹은 자발적인 노비이거나. 처음에는 그놈의 서기관 마인드에서 비롯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하루하루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좋은 공무원은 유니콘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나의 이상을 충족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 것이 어떤 상사들에게는 좋게 보일 수 있었겠지만, 평생직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매일매일을 각을 잡아가며 숨 막히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MZ라는 단어가 세상에 나왔다. 처음에는 90년생이 온다고 소리치는 책이 나오더니, 어느새 MZ는 공무원 세상에도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나는 MZ라는 신조어의 그늘에 숨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나이 많은 동료들이 ‘요즘 MZ들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누군가 MZ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김촉씨가 MZ인가?”
   “네. 제가 요즘 MZ들은 말이야, 에서 요즘 MZ를 맡고 있습니다.”


   사실은 MZ에서 Z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밀레니얼 젊은 꼰대이지만, ‘요즘 MZ들’이 하는 것들이 나는 쉽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었기에, 가끔 MZ의 힘을 빌렸다. 미디어에 나오는 것처럼 한껏 MZ력을 발휘했다간 내쳐질까 두려웠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엄격한 기준을 늘 가지고 있다가,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것 같을 때는 슬쩍 MZ카드를 꺼내 들었다. 내일모레 퇴직을 앞둔 사람들이나 보내준다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저연차 직원들도 대상’이라는 형식적인 한 줄이 더해졌을 때, 덜컥 신청해서 해외연수를 다녀왔다.(다들 눈치 보느라 신청을 안 해서 정원미달이었다.) 가끔 집합 교육을 신청해서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좋아하는 작가를 초빙하는 강연 교육이 있으면 신청해서 인문소양도 쌓았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독후감 대회에서 입상해서 팀장, 과장들과 함께 상을 받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은 했고, 쉬고 싶을 때는 쉬었으며, 하고 싶은 말도 했다. 사실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연차와 서열이 중시되는 경직된 분위기의 공무원 사회에서 신입이나 다름없는 젊은 직원들은 윗 세대 눈치를 보느라 쉽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한껏 MZ인 척을 하며 가고 싶지 않은 회식 자리에도 한두 번 빠질 수 있었고, 처음으로 3일이 넘는 여름휴가를 가보기도 했다. 선택적 MZ의 탄생이었다.


   나의 가장 MZ스러운 습관은 지시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어떤 일을 지시받으면, 꼰대 혹은 자발적인 노비답게 그냥 '넵' 하고 해내면 좋겠지만, 그것을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한번 더 확인한다. 젊은 애가 싸가지가 없다, 어린 게 경우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멀쩡한' 팀장과 근무할 때 업무에 대해 팀장과 상의하여 처리하던 내가 '그렇지 않은' 팀장과 근무해 본 이후 생긴 습관이다. 팀장 말만 듣고 넵넵 했다가 감사를 치르느라 된통 고생했던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팀장 말 듣고 했는데요’는 아무런 핑계가 되지 못한다. 비록 중간 관리자들의 결재 서명이 있다 하더라도, 담당자인 내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 세련된 MZ 가면을 쓰고 업무 처리 지시에 대해 다시 묻게 되었다. 지시 내용이나 의도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재차 물었고, 내 의견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할 일을 하면서도 할 말을 하는 직원이 되었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내 의견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다행인 것은 트민남녀인 윗 세대들이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MZ라는 단어가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MZ 공무원이 여느 MZ와는 다른 것은, 이들이 선택한 회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평생직장이라는 사실이다. 공무원의 특장점은 웬만해서는 안 잘린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평생직장이 생각보다 너무 구리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는다.(이런 데서 30년을 일해야 한다고?) 그래서 퇴사를 결정한다. 반면 나는 퇴사 대신 선택적 MZ로 사는 것을 택했다. 30년은 다녀야 하는데 벌써부터 너무 숨 막히게 살 필요는 없다. 나는 이곳에서 충분히 나다워야 했고, 편안해야 했다. 여전히 나의 일상에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에서 선택적 MZ로 사는 것은 꽤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늘 마음속에 MZ버튼을 껐다 켰다 하고 있고, 구닥다리 조직에 ‘MZ맛을 보여줘 말아’ 하며 치열하게 갈등한다.


   비록 오늘도 이유 모를 근무성적평정에 대해 이의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써놓았던 이의신청서를 파쇄기에 구겨 넣었지만, 별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주제에 눈알이 빠지도록 결산 자료와 예산서를 들여다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 ‘MZ 제1번 수칙: 회사 과몰입 금지’를 되새긴다. 비록 사기업의 여느 MZ와는 다르게 지금의 직장은 나에게 평생직장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선택적 MZ로 살기로 한 이상 윗 세대가 그러했듯 회사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서도 마음속에서도 퇴근을 못하던 시절은 끝내야 한다. 깜찍한 MZ 답게 일단 회사 스위치를 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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