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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고 Oct 09. 2024

54: 익어 가는 아빠와 자라 나는 아들 사이

일기제목: 아빠생일 & 아빠 찬양단 & 빨간 튤립 & 역사는 흐른다 등

<초2adhd일기 2023년 3월 14일_아빠생일>

지난번에 아빠 생일날 캐이크를 샀고 고기를 샀다
<초2adhd일기 2023년 4월 8일_아빠 찬양단>

아빠 찬양단 연습 하는 자리는 동생이 낄 자리가 아니이다.
에 어려서 공부 안 하니까 대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애를 부모님댁에 마끼는 것도 좋다.
그 곳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이다. 중창단이랑 쌤이랑 추가해도 댄 것이다. 거기다가 플러스 추가 할 것 없다. 아빠는 끓는 개 없다.
동생이 집에서 자라고 할것이다.  나는 엄마랑 공부하면 된다. 학습지 하는 날 1일도 빠지면 안 된다.합창단 하나 하면 된다. 콘스트 맡아서 할 필요 없다. 아빠 찬양단 하는 거 나도 싫다 에기랑 놀아줄 생각을 해야된다. 노는게 중요해 찬양단이 중요해 콘스터가 중요해 에랑 놀아줘야지 뭐 하는 거야
<초2adhd일기 2023년 4월 9일_빨간 튤립>

빨간 튤립이 예쁘다

어느 날 봉구 생일이었다. 봉구야 봉구야 봉구야 봉구 아빠는 얼른 가서 케이크랑 얼음을 사왔다. 우와 얼음이다. 시원하데이 친구들은 코코아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컵에 있는 코코아에는 물방울이 가득 했다. 우리다같이 봉구 생일 축하한다. 그때 컵을 잡았을 때 미끄러워서 컵을 쏟고 만 것이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봉구의 생일 축하합니다. 많이 먹고 많이 놀아라 아빠 감사합니다.  엄마 최고 내 생일 인데 딴 대 가고 아빠 미워 봉구야 안녕
<초2adhd일기 2023년 4월 10일_역사는 흐른다.>

아름다운 이 땅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정립치러 김유신 과학 장영실 태종 테새 문단새 상육신과 생육신 신 신 신 몬 받쳐서 논개 행주 치마 권율 역사는 흐른다. 번쩍번쩍 홍길동 의적 임꺽정 대쪽 같은 삼학사 어사 박문수 삼년 공부 한석봉 단원 풍속도 녹두장군 전봉준 서화가무 황진이 랄랄라 못 살 겠다. 홍경래 삼일천하 김옥균 균 균 균 이용완은 애국 어넝어럴은 매국 역사는 흐른다.  별 헤는 밤 윤동주 종두 지석영 33인 손병희 손병희 날자꾸는 이상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흐른다.
<초2adhd일기 2023년 4월 13일_2023년 4월13일 목요일>

내일은 재미있는 것 엄청 많다.
아빠 죽이고 싶다.
엄마는 아빠가 초등학교 6학년때 돌아가셨다. 유치원때랑 1학년때랑 2학년때랑 3학년때랑 4학년때랑 5학년때 아프셔셔 1년후에 돌아가셨다.
교과서 워크북 28쪽 29쪽 풀어오기
<초2adhd일기 2023년 4월 13일_2022년 4월13일 목요일 계획>

편의점에서 살수 있는 물건
요구르트 바나나 우유 껌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
연필 필통 색연필 연필 학용품아바와

  

  실로 오래간만에 스타벅스 2층에 앉아 있다. 세 남자가 영화관에 갔다. 남편과 큰둥이 막둥이가 없으니 홀가분하다. CGV가 보이는 스타박스 창가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가끔씩 와이파이가 끊기기는 하는데 그래도 이 여유가 좋다. 기아대책 번역자원봉사도 하고, 브런치북도 로그인할 한가로운 시간이 생긴 것이다.


  기실은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휴학도 하고 방통대에서 몇 과목 수강하는 것 외에는 그리 분주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냥 왠지 뭔가 써야 한다는 부담감, 잘 쓰지 못하는데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브런치북 로그인 하기가 싫었다. 그래도 브런치북 서랍에 담긴 호수의 2학년 때 일기들을 보면서 가끔 끄적이고 저장해두긴 했는데, 글쎄 뭐랄까 쓰고 싶고 쓰기 싫은 양가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실타래를 풀기가 영 쉽지 않다. 정리되지 않는 시간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누군가 양손을 벌리고 있어 주면 털실을 살살살 걸어가면서 풀어내면 되련만, 아직 제멋대로 둘둘 말려서 구석에 처박아둔 실타래 마냥 그렇게 그렇게 미련한 시간이 흘러간다.


  드디어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계절이 왔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적응해야 할 아픈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서 가끔 힘에 부친다. 젊음이 지나가듯 여름의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다. 몸과 마음의 노화를 느낀다. 미스터트롯 대회에서 임영웅 씨가 불렀던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는 겁니다" 가사가 떠오른다. 남편은 별채 옥상에 올라가서 감나무의 감을 따면서 "뭐가 늙는 게 아니냐? 핑계고 회피야!"라며 핀잔을 준다.


  어느새 부부는 오십 줄을 바라본다. 그런데 아직 아이들은 파릇파릇하기만 하다. 초3, 예비초 1 두 녀석들이 언제 크려냐? 늙은 것과 젊은 것 사이에는 치열한 애증이 오가는 때도 있었다. 한결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다소 누그러지는 때가 왔다. 익은 홍시를 하나를 따서 큰둥이에게 건내니 티스푼으로 헤쳐가며 먹는다. 막둥이는 입술 문에 갖다 바쳐도 꽉 다문 입술에 자물쇠가 풀리지 않는다. 홍시 맛을 알든 모르든, 나이가 젊든 늙었든 누구에게나 공평한 가을날이다.


  바람이 분다고 나이가 든다고 마냥 서글퍼하지 말아야겠다. 단도리를 해야겠다. 빈자리, 공허한 시간을 또 무언가 값진,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가야겠다. 가끔 브런치북도 찾아서 호수의 작년 일기들을 엮어서 이 해가 가지 전에 풀어내야겠다. <와일드 로봇 영화> 상영이 끝날 시간이다. 거의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 세 남자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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