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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웜띵 Nov 15. 2022

잠자리채가 영면했으면

감수성의 문제


  지난여름 마트에서 아이는 채집망을 사달라고 졸랐다. 형광 노란색의 잠자리채였다. 빨강, 파랑과 같은 쨍한 색감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의 시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색이었다.


사줄 수 없는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 카트에 싣고 계산대에 올렸다. 바코드를 찍고 건너온 잠자리채를 아이는 재빠르게 낚아채갔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으나 잠자리채를 든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은 왠지 모르게 거리낌이 느껴졌다. 산책하러 나가면서 잠자리채를 찾을 때면 내주고 싶지 않아 아이의 눈높이보다 한참 위쪽에 있는 수납칸에 찔러 넣어두곤 했다.


그리고 한 계절이 바뀐 뒤에야, 잠자리채가 영 탐탁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두 하천이 흐르고 있다. 요즘같이 일교차가 큰 시기에는 물안개가 짙게 피어오른다. 지난주 화요일 아침 역시 비가 내렸다고 착각할 만큼 음습했다.


물 먹은 공기가 빼곡하게 들어찬 공중 어느 틈 사이로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방충망에 붙었다. 새끼손가락 세 마디 정도나 될까 싶은, 크지 않은 잠자리였다. 어쩌면 딱한 마음이 들었기에 더 작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아도 잠자리에게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축축한 날씨에 젖은 날개를 말리고 곧 날아가겠지 싶어 지나친 관심은 거두기로 했다.


  그런데 안개가 완전히 걷힌 오후에도 그대로였다. 볕 좋은 하늘이 열렸으니 이제 그만 밥 먹으러 가보라며 아이와 함께 입김을 불었다. 후우-


왼쪽 세 다리가 방충망에서 떼어지자마자 잠자리는 서둘러 방충망을 붙드는 듯했다. 떼어졌다 다시 붙이는 간격이 아주 미세했다. 아이가 두 번이나 연달아 입김을 불었지만 잠자리는 다리 몇 가닥이 떼어져 흔들거릴 뿐 날아가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찬찬히 살펴보니, 철망 틈 사이로 각진 모양으로 여러 군데 찢긴 날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다친 날개를 보고 아이는, “아야, 아야.”라고 했다. 보자마자 단번에 짠한 마음이 들었던 건 괜한 일이 아니었다.



동물백과에서 찾아본 결과 ‘고추좀잠자리(암컷)’이었다.




  다친 잠자리를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어 아이의 책장 맨 아래칸에서 잠자리 책을 찾아 꺼냈다.


잠자리의 날개는 아주 얇지만, 수없이 많은 날개맥이 그물처럼 얽혀 있어서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새의 공격을 받는 등 힘이 가해져 날개가 찢어지면 잠자리는 잘 날 수 없고, 한 번 찢어진 날개는 다시 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잘 날지 못하면 굶어 죽거나 적에게 쉽게 잡아먹히게 된다는 결말까지 함께.


상어는 이빨이 빠져도 다시 난다는데 잠자리는 참 가여운 운명을 타고났다. 상어의 뾰족한 이빨처럼 잠자리에겐 날개가 생명줄일 텐데 고장난 날개가 고쳐지면 좋으련만. 어쨌든 이 정보대로라면, 이 잠자리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꺼져가는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잠자리의 일생에 대해 설명을 마친 책은 마지막 장에 ‘잠자리 잡기’라는 놀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잠자리채를 이리저리 공중에서 휘둘러 잠자리를 더 많이 잡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옴마야. 잠자리 입장에서는 이게 웬 날벼락이나 싶을 놀이법이겠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목숨 앞에서는 인간만큼이나 간절하고 또 간절해지는, 결국엔 자기 생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생명체인데.


어릴 때 친구들이 풀밭이나 천변에서 곤충 잡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적 있었다. 사람 사는 집 같은 인간의 영역에 침범한 것도 아닌데, 엄연히 자기 구역에서 자기 생활을 하다가 봉변당하게 하는 곤충 잡기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곤충을 잡으면서 논다는 건 물과 기름을 섞겠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포털에 검색해본 지식백과 내용은 더 아찔했다.

출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11814&cid=50221&categoryId=50231


잠자리에겐 식은땀 줄줄 흘릴 법한 일을 ‘삶의 지혜’를 얻을 기회라고 하다니. 가끔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물론 오늘도 집에 들어온 작은 침입자를 숨죽여 요단강 건너게 한 나로서 온전히 당당하게 할 순 없는 말이지만. 다른 숨을 앗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뿐히 지르밟고 도전정신을 세우는 데 힘쓰자는 이 의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러한 말을 할 깜냥도 되지 않는다. 다만, 유년시절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이 훗날 감수성의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의심을 풀어놓고 싶다.


정 붙이고 살기 각박해진 요즘 세상, 각종 사건 사고를 해결하는 만병통치 주문으로 여기저기서 ‘감수성’을 언급하곤 한다. 육아의 대가들도 발 벗고 나서 아이의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게 중대 과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감을 바탕으로 한 감수성이라는 건 나이 먹으면서 알아서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 전반에서 키워나가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감수성아 무럭무럭 자라나줘.


그러니 재미 좀 보겠다고 잠자리를 향해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놀이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두 돌도 안 된 우리 아이도 잠자리가 아야 한 걸 알아채는 걸 보면, 어린아이들도 자신이 휘젓는 대에 잠자리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다. 상대가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하는 놀이가 과연 놀이가 맞을까. 잠자리를 쫓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지식백과에 적힌 튼튼한 신체와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약한 존재에 대한 경시일까봐 걱정스럽다.




  우리집에 찾아온 잠자리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4일째 되던 날 아침 일어나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잠자리가 떠난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가에는 근심이 묻어 있는 듯했다. 아래로 처진 눈고리로 잠자리의 행방을 물었다. 수명을 다해 아래로 떨어졌을지, 날아가던 눈 밝은 새에게 먹혔을지 알 길이 없으니 나는 아이에게 되물었다.


“잠자리는 날지 못하고 떨어졌을까?”

아이는 빛의 속도로, 아주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니!”

새가 잡아먹었겠냐는 질문에도 목청 높여 아니라 했다. 며칠 푹 쉬었으니 기운 차리고 훨훨 날아갔겠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소리를 낮추며 그렇다 했다. 잠자리의 정확한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의 촉촉한 감성만은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가 가진 지금의 감수성이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풍부해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신발장 위칸 어딘가에 대충 잠들어 있을 잠자리채를 한 칸 위로, 그리고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집어넣어둬야겠다.

잠자리채 쓰일 일 없을 듯. 역시 충동 구매는 옳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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