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일정에 맞게 관광을 하고 난 뒤 저녁식사부터는 자유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가이드님의 추천 음식점 중 가성비 좋은 와규집이라던 ‘쇼와쿠 호르몬 와규’으로 향했다. 마침 웨이팅이 생기기 전이라 운 좋게도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가게를 나올 때 즈음에는 문 밖으로 긴 줄이 생겨있는 걸 보니 유명한 곳이긴 한가보다. 한국인 직원분도 계시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친절해서 좋았다. 게다가 짤막한 내 일본어 실력에도 일본어 잘한다며 칭찬해주셨는데, 이 집 영업 잘한다. 별개로 소고기는 역시 한우라는 게 우리 가족의 감상이었다. 한우가 유명한 지역에서 와서 그 부분은 이해해 주길. 그래도 마지막에 시킨 해물 모둠 꼬지는 어머니의 엄지를 받아냈다.
"일본에 오면 해산물을 먹어야겠네~! 너무 맛있다."
"그러게 다음엔 해산물 위주로 많이 먹어보자."
다음을 기약하며 이후에는 도톤보리 거리에 있는 잡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H&M매장에서 세일을 하기에 들어가 봤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분홍색 티셔츠가 1320엔이기에 얼른 사드렸다. 엔화 동전을 탈탈 털어서 냈는데, 일일이 세는 점원의 모습에 절로 ‘죄송합니다.(すみません)’가 나왔다. 그런데 점원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웃음을 드렸다는 점에서 좋은 거겠지.
싱글벙글 신난 얼굴로 옷이 담긴 쇼핑백을 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다가 그 옆에 서계신 아버지를 봤다. 그제야 아버지 것을 못사드렸다는게 생각났다. 구경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그림자인 마냥말이 없으셔서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진짜 관심이 없으셔서 그랬던 것이겠지만, 아무튼 조금 난감했다.다음에는 어머니 한 개 살 때 아버지 것도 꼭 같이 사드려야겠다.
화려한 도톤보리 돈키호테
여행 온 사람들이 꼭 들른다던 돈키호테에 들어가 봤는데 계산 줄이 매장 1층 한 바퀴를 삥- 도는 것을 본 어머니가 식겁하시면서 말했다.
“아이고 답답하다 나가자!”
나도 그게 좋겠다며 튕겨나듯 얼른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머니는 사방이 막힌 공간이나 고층과 같은 공간을 힘들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좁은 공간에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것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으시는 듯했다. 쇼핑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을 들렸는데 부모님도 어느새 익숙해지신 듯했다. 아버지께 줄이 길어 못 먹은 킨류라멘의 아쉬움을 달래 드리기 위해 커다란 사각 유부가 들어간 키츠네 우동을 사드렸다.
키츠네 우동
참, 감사했던 게 로손과 같은 편의점에서 카카오페이로 결제할 시 50%의 할인을 받을 수 있다며 친구가 정보를 줬다. 그 덕에 9,022원 낼 것을 4,515원에 구매했다. 짧은 여행이지만잘다녀오라고신경 써주던친구들에게 고마웠다.
두 번째 편의점 파티가 열렸다.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들을 펼치고 음료를 따른 뒤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습니다. 내일을 위해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Rec
“어머니,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
“오늘 청수사를 올라가는데, 정말 뜨거운 햇볕 아래에 언덕을 올라가는데 등에는 땀이 줄줄줄~ 흘러가고. 올라가니까 옆으로는 또 상점이 빈틈없이 차곡차곡 있데. 그런데 정상에 올라가니까 저 청수사 본당은 웅장하고, 포토존에서 바라보니 그림도 이쁘고.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우리 영이는 그 찹쌀떡 조청에 찍어 먹는 거 먹고 싶어 가…”
“하하하!”
“아이고 얼마나 힘든 내리막길을 내려가가꼬. 영아 따라간다고 엄마가 더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여하튼 땀 흘린 만큼 좋았다. 그리고 치쿠린 대나무 숲 조금 습하고 더웠지만 거기도 나름 기찻길을 지나서 운치 있고 좋았어.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는데 진짜로 뜨거웠다.”
“온천은 좋았지?”
“온천은 정말 이래서 온천을 가는구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저녁은...”
“저녁은?”
“나는 라면으로 돈도 아끼고 하고 싶은데, 우리 영이가 어구야꼬 와규를 먹겠다고 우기고 우겨갖고 엄마가 졌지.”
어머니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마치 다시 보기 하듯 하나하나되짚어가며 이야기해 주셨는데, 생생하게 표현하시는 만큼 기억에 남은 듯하여 뿌듯했다. 한 달여 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괜히 어색하고 이런 거 왜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루를 묻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소중해진다.주기적으로 의식적으로 꺼내주는 게 좋다.
그리고 내가 당고 사 먹겠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달려 나갈 때, 어머니는 뒤에서 이런 생각을하고 계셨다는사실도 알 수 있으니 재밌고 좋지 않은가? 아직까지 애같이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제 보니 애같이 행동했네! 이번에는 말 수 적은 우리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아빠는 일본 온다니까 어땠어요?”
“아무 생각 없었지 뭐, 가는구나 하고.”
“막상 오니까 너무 좋지?”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이틀 되니까 그냥 비슷하네.”
우리 아버지는 좋다, 맛있다와 같은직접적인 표현을 하시는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는 성의 없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천천히 꺼내신 말이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편하게 즐기고 계시다니 다행이었다. 낯선 공간이 싫고 집을 떠나기 싫어하셨던 어머니도 가족과 함께 오니 외국도 무섭지 않다며 말했다.
“안 무섭지?”
“응, 괜찮았어. 그리고 오니까 아, 오기를 잘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함께 올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좋다고 느꼈던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날씨 요정 손 드세요!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 복 받으신 거예요.”
가이드님의활기찬 아침 인사와 함께마지막 투어가 시작됐다.정말 강한 날씨요정이 있기라도 하듯, 일본에 있던 3일 동안 매일 있던 비소식은 모두 틀렸다.특히 오늘이 가장 다행이었다. 나라 사슴공원은 사슴의 수만큼 똥도 그렇게 많다던데 일기예보 대로 비가 왔다면 어땠을지. 물에 적셔진 사슴 똥이라니, 생각만으로도 구린내가 코끝에 스치는 것만 같다.
어쨌거나 우리는 뜨거운 태양아래 바짝 말라 흙인지 사슴똥인지 모를 것들만 봤을 뿐 아무 악취도 느끼지 못했다. 사슴에게 먹일 수 있는 센베를 사서 주는 체험도 해보고 싶기는 했으나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센베 대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비비며 있는 척 유인해서 사진을 찍었다.
더위에 지친 어머니도 사슴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머리도 쓰다듬고 등도 토닥여주며 즐기셨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다. 아버지는 야생동물은 절대 손으로 만지지 않는다는 주의이시기 때문에 눈으로만 귀여워해 주셨다. 이제 볼만큼 봤다 싶은 우리 가족은 사슴들을 뒤로하고 급하게 카페를 찾았다. 더위에 지쳐 스타벅스인 줄 알고 들어간 카페는 알고 보니 유명한 빙수 전문점 '소스케 바이 호세키바코'였다. 오히려 좋아!
오색빛깔의 예쁜 빙수 사진을 보며 어떤걸 골라야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뭐가 뭔지 몰라 고민이었다. 결국 사슴쿠키가 올라간 노란색 빙수를 골랐는데, 그게 가장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금빛의 빙수가 우리 앞에 놓였다. 그때 먼저 빙수를 먹고 있던 패키지 일행인 여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맛 시키셨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실 써져 있는 게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서 예뻐 보이는 걸로 골랐거든요.”
“어! 저도요. 몰라서 그냥 사진 보고 골랐어요. 그런데 홍차맛인 거 있죠?”
나는 얼른 눈앞의 빙수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저희는 고구마 맛이에요! 맛있다.”
“고구마 맛이에요? 맛있겠다. 저희는 홍차라 별로 안 달았어요. 저는 괜찮은데 할머니가...”
여자분은 할머니와 단 둘이 여행 온 손녀분이셨다. 그런데 자기네가 시킨게 하필 홍차맛이어서 달지 않아 할머니가 안 좋아하시더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 걸 나눠드릴까 했지만 할머니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계셨다.손녀분과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빙수를 시킨 다던가 하는 이야기로 웃음을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 더위가 싹 가시는 달고 시원한 고구마 빙수, 5분 컷이었다.
고구마 빙수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뒤 둘째 날과 셋째 날 이틀 동안 우리를 태워주신 기사님께 전과 같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첫날의 기사님과 달리 드라마에 나올 법한 터프한 이미지의 할아버지셨는데, 멀어지는 그 순간 까지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셔서 감동이었다. 짧지만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은 여행이었다.
캄캄해진 김해공항에 도착한 뒤, 우리가 몰고 왔던 차를 찾아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안 힘들더나?”
“전혀. 행복하기만 한데!”
힘든 것 따위 금방 잊힐 만큼 좋음이 강했다. 집에 돌아와 캐리어에 든 짐을 정리하며 어머니는 가까운 울산에 다녀온 것 같다며 말했다.
“오사카 다녀온 게 꿈만 같다.”
이번 가족여행을 해외로 밀어붙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좀 더 일찍 가봤으면 좋았을 걸 싶다가도 지금이라서 좋은 점도 있으니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걱정했던 어머니의 무릎과 다리는 신기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고, 음식이나 잠자리에 대한 부모님의 불평불만도 딱히없었다.<부모님 해외여행 금지 15 계명>에 나오는 '아직 멀었냐', '돈 아깝다', '물이 제일 맛있다'가 나오지 않아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이 정도면 완벽한 가족여행이지 않나?
악명 높은 일본의 여름, 자유여행이 아닌 패키지, 고급호텔이 아닌 비즈니스급 호텔 등등 최고라 할만한 조건은 아닐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세 명이 누울 침대가 있고,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패키지라 알 수 있는정보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즐겁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기를 지나친 객관화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