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결과
여유로운 휴일을 만끽하기 위해 아버지와 카페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바닐라라테도 마시고 빵을 먹으며 기분 좋게 책을 읽던 중 지역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02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촉이 왔다.
알고 보니 직장출장검진을 왔던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의 병원직원이 간암종양 뭐시기의 수치가 어쩌고 하는데 낯선 단어이다 보니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고는 간암이라는 것 밖에 없어 통화하는 내내 바짝 졸아 있었다. 통화가 끝날 즈음에야 간신히 알아들은 그 단어는 ‘간암 종양표지자’였다. 그녀는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으니 가까운 내과나 자기네 병원에 와서 한 번 더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술 안 마시지,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도 잘 먹지 않는데 갑자기 간이라니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내게 건강검진 결과라고는 키랑 몸무게 그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보는 게 다였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라고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바로 앞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에게도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해 드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의 롤러코스터는 잠들기 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이놈의 간암종양표지자가 뭔가 하고 검색해 봤더니 생각보다 정보가 별로 없다. AFP수치라고 이 수치가 간암을 판별하는 표지자라는 것, 그리고 간암뿐만 아니라 전립선암, 난소암, 대장암, 췌장암, 담도암 등의 암을 판별하는 표지자가 다양하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검사로 이런 것도 알 수 있다니 의학의 발전에 새삼 경탄했다.
동시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의사인 양 구시는 게 이해가 됐다. 그들의 지식은 직접 겪으며 쌓은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때때로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피우시기도 하지만, 마냥 나쁘게 보기보다는 측은하게 여겨주길. 그들도 처음부터 원해서 그런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다음날 당장 내과를 찾았다. 부모님이 오래되긴 했지만 나름 내공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신 곳이었다. 진료실에 들어간 뒤 전화로 들었던 내용 그대로 의사에게 전달했다.
“건강검진을 본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간암종양표지자 수치가 8.0으로 높게 나왔으니 내과에 가서 진료를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그 정도면 정상수치네요. 400~500이 높은 거고, 100 정도 되면 이제 간이 안 좋으니 조심해야 하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정상범위로 걱정할만한 건 아니라고 했다. 수치가 높다고 한 그분 덕에 혼자 드라마 한 편을 찍었다. 그것도 주말 드라마. 땅콩 같은 견과류에 생기는 곰팡이 균이 치명적이니 조심하고 되도록 상한 것 같은 음식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뻔하지만 진리인 의사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커피 마셔요?”
의사의 질문에 ‘어떡하지, 혹시 앞으로 커피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하는 불길한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네….”
“하루에 한두 잔 정도는 간 건강에 좋아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커피 마시는 걸로 잔소리하시던 어머니 앞에서 당당히 커피를 마실 이유가 생겼다. 간호사님을 따라가 피를 뽑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앵무새처럼 어머니에게 한 번, 아버지에게 또 한 번 설명해 드렸다.
그날 저녁 마트에 장을 보고 돌아와 엄마와 둘이서 그동안 내가 뭘 잘못 먹었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던 중 내가 늘 먹던 호두 그래놀라가 눈에 들어왔다. 뒤에 써진 보관법을 읽고는 어머니가 말했다.
“앞으로는 냉장보관하자!”
거기에는 개봉 후 냉장보관이라고 쓰여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이것 때문이라고 확신하시는 듯했다. 그래놀라에 견과류가 섞여있는 걸 알고 있었고, 견과류는 냉장보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밀봉되어 있으니 밖에 둬도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게 나의 실수였을까. 물론 이게 이상 수치의 큰 원인은 아닐 것이다. 일하며 생기는 스트레스와 늦게 자는 습관 등등이 한몫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보관법은 바꾸기로 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라는 새 캐릭터가 등장한다. 불안이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안 좋은 상황을 가정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들도 결국 나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건강에 대한 불안이 없었으니 운동에 게을러졌고 사소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건강검진 결과는 느슨했던 삶에 좋은 긴장감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불안한 마음이 결국 우리를 불안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책의 문장을 떠올리며 건강을 위해 다시 운동을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