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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miltonian Sep 27. 2022

진로 선택에 대하여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 기준

많은 사람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도 마찬가지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선택했으나 일관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내 선택에 대해 한 점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이 본인이 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또래보다 조금만 높은 성취를 보여도 선생님, 부모님, 또래의 인정과 칭찬이 그 분야를 좋아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애매한 재능을 가졌다는 데에 있다. 본인이 선택한 분야로 깊이 매진할수록 세상은 넓고 자신의 실력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수학이 그러했다. 선배들을 제치고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고, 손위 형제가 내는 적분 문제를 기하학 지식으로 풀어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는 신동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해 각 지역에서 모인 똑똑한 아이들과 겨루자 나는 죽어라 노력해도 평균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수학이 점점 애증처럼 느껴졌다. 수학을 그만두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재미있지가 않았다. 내가 그토록 못하는 수학을 앞으로 더 진지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 시절 오히려 내가 잘하는 것은 프로그래밍이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접한 프로그래밍은 너무 재미있었고 또래에 비해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수학을 사랑하는 만큼 프로그래밍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바쳐서 할 일로는 수학같이 정통적이고 무거운 것을 하고 싶었는데, 프로그래밍은 조금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니 정말 웃긴 생각이지만!)


그래서 뜬금없게도 나는 수학과 프로그래밍이라는 양 극단의 중간에 있는 물리를 선택하였다. 수학보다는 덜 사랑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바쳐서 할 만큼 무거운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래밍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물리도 나름 나쁘지 않게 하는 편이었다. 전공을 선택한 날 한없이 착잡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수학자라는 꿈을 이제 이루지 못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우습게도 물리과에 진학해서 깊이 파고들자 나는 물리마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운 지식들이 피부로 와닿지 않고 휘발되는 느낌이었다. 각종 물리량들의 정의를 읽으면 그 당시에는 이해됐으나 이내 곧 까먹곤 해서, 문제를 풀 때마다 정의를 찾아봐야 했다. 학부 4학년이 되어서도 라그랑지안과 해밀토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좌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진로를 찾지 않았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외에 다른 기준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모두가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고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의미가 와닿지 않는 일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평생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학부 중간에 잠시 휴학을 하고 회사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다. 좋아했고, 나름 또 잘 해냈지만, 내가 만들고 있는 제품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이미 편리한 삶을 아주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드는데 내 평생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공학을 한다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공학보다는 자연을 이해하는 과학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렇게 확신을 갖고 학교로 돌아왔기 때문에 좌절하면서도 계속 물리를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니 물리의 개념들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마치 계속 버틴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는 듯했다. 중요한 것은 내 물리 실력과 상관없이,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물리를 하는 매 순간이 행복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매일 살고 있다.


중요한 질문은 나에게 일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으며 (생활 수단, 자아실현, 사회적 인정 등등) 그에 맞는 가능한 선택지가 무엇이 있느냐이다. 나는 이것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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