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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 ChoHeun Apr 17. 2023

칸딘스키가 법전을 덮은 듯이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내 직업은 회계사다. 아, 고쳐 말해 ‘직업’은 회사원이고(회사원이었고) 공인회계사는 일종의 자격 표시인데 주위에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가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죽을 때까지 유효한 ‘쯩’ 이 있어 부럽다고도 한다. 간혹 (부모님과)나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장롱 안에 두어서는 아이들 태워 다니며 요긴하게 쓰는 매일의 운전면허만 못한 것을. 실제로 ‘언제든’ 돈 벌게 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그 ‘마음만 먹으면’이란 내겐 결국 넘지 못할 산이다. 물러설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데만 무수한 시간과 감정을 허비해야했다. 굳이 몇 가지나 손가락으로 셈하여야 할 다른 이유들이 필요했을까. 이제 정말 하고 싶지가 않은거다. 나는 곧 장롱회계사가 될 것이 유력한 바이다.               



*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을 대면한 날에, 엑셀 파일 한 부를 전달받았다. 지인으로부터 재무제표 검토를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변혁의 순간에 존재했던 위대한 예술품의 벅찬 잔상을 그대로 담은 채, 블루라이트 안경을 고쳐 쓰고 숫자 빼곡한 시트를 열었다. 촉촉하게 여울진 눈으로 들여다본 계정 잔액이 도무지 애를 써도 해석되지 않았다. 전범국가인 독일의 예술가로 살며 나치의 탄압에 맞선 신념을 그림과 조각 속에 담았던 거룩한 작품들을 직접 보고 온 터였다. 엑셀 창 상단의 X단추를 누르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난 더 이상 좌뇌를 굴려 살 수 없는 인간형이 된 것을 인정할 때이다.                




 어려서부터 줄곧 천재였던 칸딘스키는 그렇게 법전을 덮었다. 그는 후대에 추상 예술을 탄생시킨 화가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본래 저명한 법학과 교수로서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 없는 뛰어난 학자였다. 취미로 미술관을 즐겨 찾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한 점의 작품을 보고 인생에 경험한 적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빛과 색. 형태가 없이도 예술이 되고 격렬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치를 깊이 깨달은 칸딘스키는 그 길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붓을 샀다. 화실을 등록해서 배우고 평생 그림을 그렸다. 칸딘스키의 법전을 덮게 한 작품은 바로 모네의 ‘건초더미’. 예술품 자체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칸딘스키의 인생을 바꾸고 추상미술의 시초를 열게 한 스토리를 더하여 모네의 그림 중 최고가를 경신한 전설이 되었다.      




 칸딘스키의 <흰 붓자국>을 본다. 점 선 면이 적당히 조화롭고, 불분명한 형태에 비해 색감은 비교적 편안 따스하기까지 하다. 제목을 몰랐더라면 추상미술의 시초가 된 거장의 작품이라기엔 흘깃 지나쳤을 그림 같기도 하다. 한참을 머문다. 아직 신출내기의 눈으로는 들여다볼수록 문 닫힌 미술학원 유리창에 걸린 듯한 익숙함이 슬쩍 차올라 아무도 모를 머쓱함을 남긴 채 돌아선다.


 교수로서 나를 주목하는 학생들로 가득 메운 강의실이 아닌, 고요한 방 안에 홀로 앉아 텅 빈 캔버스를 처음 바라보던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법전을 내려놓고 물감 칠을 하며 흰 붓자국을 남긴 그의 세계가 자꾸 궁금해졌다. 더 이상 사물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 본질의 표현과 음악의 추상성과도 같은 것을 그림 안에 추구하고 싶었던 천재 작가의 신념을.     




백색의 공간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깊고 완벽한 적막이다.


 아마도 그런 믿음으로 붓을 쥐었을 것이다. 칸딘스키는 ‘뜨거운 추상’을 그렸다. 폭발적인 인간 내면세계가 형식 없이 요동하는 비구상적 예술. 이를테면 <Sky blue>와 같은 (얼핏 귀엽기까지 한) 작품은 전쟁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한 자유와 생동감을 표현한다. 가장 내면적인 것을 그리고 싶었던 ‘그의 추상’을 좀 더 보고 싶어졌다. 시대적 배경과 예술적 사상을 충분히 아는 것도 흥미롭지만, 온전히 점과 선, 색으로 채워진 크고 작은 한 폭의 공간마다의 몰입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통통 튀어 오르는 음악의 선율이 들려올 듯한 감정의 무한한 자유 같은 것을 흠뻑 느끼고 싶어졌다. 돌아오는 월요일엔 전시장을 다시 가야겠다.


 비싸고 유명한 피카소 그림을 가장 열심히 보고 돌아선 길에 온통 칸딘스키를 떠올리며 왔다. 시대와 인물, 분야를 가를 것 없이 본업을 접고 예술적으로 성공한 사연이라면 취한 듯이 빠져드는 (퇴사 직전)희망 수집가다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어김없이 피카소의 대작 앞에 열렬히 감동을 표하고 어느 귀퉁이 작품 한 점의 스토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깨닫는 흥분과 설렘의 묘미를 n차 관람 일지에 마저 담기로 하며.  




                     나의 서툴고 재미난 예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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