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
난 요즘 재미난 일을 한다. 이름과 얼굴만 아는 이들과 함께 책 이야기를 하고 속 깊은 사정을 나눈다. 살면서 처음 경의중앙선을 탔고 풍산역이라는 곳에 내렸고 그렇게 1시간 반을 걸려 자그마한 서점에 도착했다. ‘건우네 책방’. 이곳은 나의 비밀스럽고도 새로운 세계다.
실은 아주 어렸을 때 소설을 썼다.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던 열다섯 소녀는 해 본 적도 없는 사랑 얘기를 그렇게 썼다. 등장인물 관계도를 구성하고 운명적인 사건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엄마 아빠 모르게 날이 새었다. 지극히 모범생인 나에게 공부니즘 한 가운데 소설이 있었다. 3월의 책 모임을 향하는 낯선 길, 지금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하얀 솜 나무에 취하여, 우연히 그때를 떠올린다. 아주 오래전에도 나는 무엇을 쓰면서 행복했구나.
한참을 걸려 다시 읽게 되었고 쓰는 세계로 넘어오는 중이다. 본디 나의 세계는 먹고사는 현실로 빠듯하게 말라 있었다. 작가와 곰치가 그러했듯.
그/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그랬다면 나인 투 식스의 삶에 제대로 길든 채 살았을 것이다. 죽이 잘 맞는 동료와의 소소한 대화에 느슨한 소속감을 느꼈을 것이고 가끔 공돈이라도 생기면 히죽거리며 좋아했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이를 보며 은근한 우월감을 즐겼을 것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거저 얻은 안도감을 손에 꽉 쥐고 행복해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겨우 살아가는 것들을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팝콘을 집어 먹었을지도 모른다.
뒤에 실린 ‘작가의 말’은 곧 다듬어진 곰치의 말이기도 했다. 곰치보다 합법적으로 먹고살 뿐. 그가 처음으로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여전히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끄적거리며 무언가에 관한 꿈을 꿀 때.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의 세계를 소설을 통해 건넌다. 알고 싶지 않은 어둠과 무서운 죽음과 끔찍한 사고 같은 것을 자꾸만 이야기하는, 정말 싫은 숙제처럼 쥐고 있던 얇은 소설집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세상도 있구나. 아름다운 벚꽃만 보며 살 수 없는 현실 속에 소설을 통해 그것을 보는 의미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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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규 소설집을 열렬히 논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우리는 모여서 웃었다. 이를테면 <달 뒤편에서의 조식> 같은 우울한 주인공의 삶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절묘한 상상력 같은 것을 마구 발휘했다. 그러면서 주름이 지도록 웃었다. 첫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며 하필 내 취향이 너무 아닌 책이라 말할 거리도 없겠다는 마음으로 와서,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속에 담긴 나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책을 읽는 ‘두 개의 세상’에 대해 함께 나누었다.
그렇게 다시 먼 길을 걸려 집으로 왔다. 아이를 맞이하고 어김없이 마들렌을 사 먹고 수북한 꽃나무를 보며 걸었다. 저녁에 자려고 누워 품에 안긴 둘째가 말한다.
“우리 엄마 오늘 한 번도 화 안 내고 예쁘다. 노력해줘서 고마워.”
엄마가 언제는 그렇게 화를 냈니. 그래도 좋다. 나의 먹고사니즘에 소설이란, 책이란, 그런 것이다. 때로 나의 세계가 퍽퍽할 때. 해야 할 일들로 꽉 들어차 정신없이 아이를 보채고 신경이 곤두설 때. 없는 걱정도 새로 만들어 우울한 감정을 퍼 올리며 가족들에게 한 치의 마음도 너그럽게 줄 수 없을 때. 그런 고민에 갇혀 아이가 보고 있을 엄마의 웃는 얼굴과 예뻐야 할 말들에 도무지 인색할 때. 책 모임에 다녀온 오늘의 나는 종일 생기가 흘렀다. “우리 엄마, 고마워.” 같이 베갯잇에 누워 속삭이는 딸의 인사가 내게는 소설을 읽는 이유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