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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 ChoHeun Mar 24. 2023

[08] 마음의 매듭을 풀어야 새 길을 갈 수 있다

잘 살고 있는 문제



 엘리트는 못되어도 꽤 괜찮은 밀레니얼 세대의 성취를 이루었다. 손안에 드는 대학을 나와 전문 자격증을 땄고 안정적인 금융기관에서 일한다(일했다가 될 예정이며). 꼭 알맞은 나이에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만성 생리불순의 중대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토끼같이 예쁜 딸도 둘이나 낳았다. 고금리를 떠안은 '시대의 영끌족'으로 살지만 서울 가까운 아파트를 마련하고 소득 대비 좋은 차를 타며 미식과 여행을 즐긴다. 백 번쯤 들었다 놨다 고민하고 가격을 비교하는 수고로움은 있어도 갖고 싶어 죽겠는 옷과 가방은 대부분 내 것이 된다. 남편의 벌이는 내가 몇 년쯤 육아휴직을 하며 맞벌이를 쉬어도 가계의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아이들 교육비나 생활비를 대는 데 치명적 고달픔이 없다. 부모님은 연세가 들며 크고 작은 병환을 겪으셨지만 감사하게도 경제활동을 지속하시고 양가 다복하게 지낸다. 30대를 관통한 우리 가족의 시련은 결혼하고 얼마지 않아 남편이 힘든 수술을 하고 몹시 아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완치 받아 절주하고 운동하며 건강체를 유지한다. 아이들도 정성들인 보람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잔병 없이 자란다. 객관화의 중요성이다. 늘어놓고 보니 바로 아침까지 극도의 우울감에 시달렸던 감정이 맹랑하게 와닿는다.

 잘 살고 있네. 도대체 뭐가 문제지.

 그렇다. 나의 삶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어디서부터 꽁꽁 묶여 버린걸까. 이만치 그럴듯한 상황 속에서도 불안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란 끝내 병원을 찾아 의학적 진단을 받아야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자존심에 목숨 거는 고집스런 성격이 아님에도 그것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그즈음 지나영 교수님의 ‘본질육아’를 접하고 있었다. 엄마의 우울은 결국 가장 힘없는 존재를 향한 감정 쓰레기로 처리될 것이다. 나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오은영 박사님과 지나영 교수님을 번갈아 붙들며 육아만큼은 정신 차리고 해야 했다. 본질육아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옆집 엄마 신경 말고 우리 모두 손을 잡고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동시에 영감을 받은 것이 ‘셀프육아’ 였다. 그래, 나부터 키워내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건 불가능이지만 이제라도 그때의 나를 돌이켜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정성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소중한 존재로서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며 누구보다 지지해주어야 한다. 우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충분히 바라보기로 했다. 핵심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셀프육아라고 해서 별다를 이유가 없었다.     


 비록 스스로 개척한 길은 못 되어도, 40대 문턱에 선 나이가 무색지 않게 앞이라 짐작한 방향으로는 가고 있었다. 세월이 도운 것이다. 모범생 시절의 10대를 지나, 뒤늦게 불어온 질풍 속 20대를 견디고, 멈출 줄 모르는 30대의 회전문 사이로 열심히 달렸다. 성실하게 버텼고 성숙함이라는 꽤 쓸만한 무기를 장착했다.


 집 앞에 누군가 꾸밈없는 상태로 아무 때고 마주쳐도 그대로 서서 한참 얘기나눌 수 있는 사람도 되었다. 여전히 친구들과의 약속은 내 쪽에서 잡는 편이었고 일하며 아이 키우랴 시간에 쪼들렸지만, 울타리 한켠에 쪽문을 내어 두고 먼저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없는 분초라도 만들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게는 노력이었다. 요즘 산 좋은 옷을 입고 매끈하게 외모를 가꾸어야 모임에 갈 수 있다는 강박을 떨치려 애썼다. 중요한 약속 전날에도 가족들과 맛있고 건강한 식사를 양껏 하였다.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는 의미로 정해진 만남은 내 쪽에서 깨는 법이 거의 없었다. 안부 인사를 나누는 첫 5초 남짓 ‘더 예뻐졌네. 늙지도 않아. 새 가방 들었군.’ 식의 스캔 따위, 관계에 있어 유의미하지 않음을 의도적으로 상기했다. 어차피 찰나의 이미지로 스칠 뿐 상대방은 나의 그런 것들에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면 편안하고 유쾌해서 자주 만나고 싶고, 돌아서면 함께 시간을 보낸 것에 흐뭇함이 남는 그런 매력에 자꾸 관심이 간다. 외적인 치장은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다정하고 온화해서 단정하고 우아한 멋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어려서 막연히 동경해 온 모습도 본디 그런 것인데 누구에게도 조언을 받은 적이 없는 터였다.

 새벽에 일어나 인적이 드문 공원을 산책하며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니 ‘아, 내 인생에 멘토가 존재하지 않았구나.’ 불현 듯한 깨달음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같은 길을 먼저 가며 어려울 때 힘을 얻고 지혜를 구할 수 있는, 남편도 부모도 친구도 아니지만 존경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곁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이 길이 도달해야 할 ‘끝’에 대해서는 일부러 생각지 않는 것이 나와의 암묵적 합의가 되어버렸다. 원체 길눈이 어두워 다른 방향으로는 감각도 없고 앞에서 끌어주는 이가 없으니 그저 맞는 길이겠거니. 어릴 적 치열한 고민의 과정 없이 탐색 버튼을 눌러버린 내비게이션 경로 그대로 가던 길을 가야 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피가 나면 어설픈 응급처치를 해서 계속 갔다. 내리막은 브레이크 잡는 법을 몰라 위태롭게 질주하고 가파른 길은 위험천만하게 기어오르는 힘겨운 여정을 외로이 반복하며. 난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버티는 것도 잘한다는 위안을 삼고 혼자서 안도했다.

 실은 감성 충만형에 욕심도 있는데. 길이 아닐 듯한 쪽을 기웃거리는 시간 낭비를 참지 못해 목표만으로 전진한 삶이었다. 새로운 것이 두렵고 귀찮아서 보장된 안정만을 추구하는 효율적 인간으로 살아온 20년 어른의 삶. 어쩌자고 이제 와 송두리째 흔들리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가 아니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는 지금 변화해야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바보 같은 질문을 멈추자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고, 꿈을 꾸어야 숨 쉴 수 있구나. 그걸 몰라서 먼 길을 돌아왔구나. 마음 속 풀지 못한 매듭은 나와 주변의 가까운 누구도 내가 그런 사람인 걸 알려고 하지 않은 이유로 꽁꽁 묶여있었구나.


 나는 그 매듭을 스스로 풀었다. 묵은 감정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골몰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까지 오려고 이렇게나 힘들여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이다. 입가에 길다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잘못된 길의 끝이 아주 잘못은 아님에 감사하며. 내 잘못된 길은 이 지점을 끝으로 한다.     

맺힌 것을 찾아서 다 풀어주자.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매듭을 풀어야 새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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