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 일 때문이었을까

by 소소연

매 12월만 되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우울한 기분이 든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입사 2년 차였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직진하고, 솔직하고, 빠른 사람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싶으면

누구를 거치든, 어떤 분위기든 바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우연히 입사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호봉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내 입사동기들은

대학원을 나오거나,

군대를 다녀오거나 해서

나이가 차이가 좀 나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나이도 같고, 군대도 가지 않은

동기와 호봉이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녀 호봉이 왜 3년씩 차이 나는 걸까?

하는 일도 똑같은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 있었다.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문제라고 생각했고,

더 당연하게 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아무도 내게 “해보라”라고 한 적 없는데

나는 인사팀을 찾아가 설명을 요구했고, 하소연도 했고, 울기도 했다.

노조를 찾아가 이야기도 하고, 언론 인터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용감했다기보다

그냥 내 성격답게 행동했을 뿐이다.

옳다고 생각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멈출 수 없었던 시절이니까.


결과는? 바뀌었다.

2002년 10월 회사는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 권고를 받았고,

2003년부터 6개월에 1호봉 씩 올라가서 같은 호봉이 되는 데 1년 6개월이나 걸렸고,

그 사이에도 여전히 임금과 승진의 차이가 있었지만,

조용히 지나가듯 점차적으로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었다.


그때의 나는

조직의 속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앞서간 사람이 결국 시스템을 바꿨지만,

시스템은 그런 사람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매해 12월만 되면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그때… 찍힌 건가?”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승진은 과장 승진은 10년 만에 겨우 한 번 왔다.

그 이후로는

차장이라는 ‘오래된 과장’ 상태로 15년을 서 있다.

그 15년의 시작점이 혹시 그때 그 사건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늘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고 산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조직이 좋아하든 말든

나는 내 방식으로 일했고,

그 결과 누군가는 조금 더 공정한 기준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옳다고 믿었던 일을 했다는 사실은

승진과는 별개로

나에게 오래 남아 있는 자존감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자존감 덕에

승진이 늦어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 내가 그래도 이런 일은 했던 사람이잖아.”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의 불꽃같은 움직임이

내 커리어의 첫 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꽤 마음에 든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끔 피곤하기도 하고,

가끔 뿌듯하기도 하고,

가끔은…

그냥 시크하게 정리한다.


“진짜 그거 때문이면, 너무 치사한데? 뭐, 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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