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강가 Dec 31. 2023

27. 사유의 공간

#1 겨울, 스며드는 감정의 온기


고속도로는 빠른 대신 지루해 재미가 없다. 그래서 바쁜 출근길은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여유로운 퇴근길은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직장이 옮겨져 새로 출퇴근을 하며 약 1년을 다니고 있다. 그러던 중 퇴근길에 어떤 한 곳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였다. 도대체 저기는 뭐 하는 곳인가 싶어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유명한 건축가들이 함께 조성해서 개장한 지 1년 정도 되는 신생 수목원이었다. 사유원,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물이 함께하는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라는 소개에 마음이 동했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중략)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김훈 / 자전거 여행)는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주변에 저수지와 야산이 전부인, 시골 마을로 들어가는 국도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팔공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를 따라 만들어진 숲을 마주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오히려 도시 외곽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수목원이라고는 하나 동네 야산의 탐방로를 걷는 기분이다. 사람의 손길로 단정하게 가꾸어져 있다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숲길에 듬성듬성 거친 콘크리트 건물들이 놓여있다. 멀리서 보면 피사의 사탑 같기도 하고, 라푼젤이 갇힌 성의 일부 같은 '소대'부터 시작해 사각 형태의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이 단순해 보이는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사유원의 세계는 공간의 흐름과 차원의 이동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정적인 동시에 동적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며 무한히 변화하는 모습에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히 흐른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 본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내 안으로 깊이 침잠할수록 좁고 어두운 내면에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우기라도 하듯 얼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곳은 사실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하늘만 보이는 마당으로, 물소리와 함께 평정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날이 추워 꽁꽁 얼어버린 공간은 얼음의 밀도만큼이나 빽빽한 생각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아름다움만 남긴다. 아름다움은 늘 위험하고, 위험한 건 늘 아름다운 법이다. 사유원은 생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름다워서 위험한 공간이다. 





문 여는 시간에 들어와 문 닫는 시간에 나간다. 시간의 흐름도 잊을 만큼 곳곳을 누비며 걸었다. 내가 서 있는 공간은 결코 1차원이 아니다. 유한한 삶이지만 한정된 삶은 아닌 것이다. 그 공간에 나와,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또 어떻게 볼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우린 그래서 7번 국도로 떠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