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봄, 피어나는 우리의 마음
연애 초반 무렵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제일 위에는 책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를 따라 검은색 테두리가 있다. 테두리 안으로는 '읽는 약'이라고 쓰여있고, 그 밑으로는 내 이름(귀하)이, 또 그 밑으로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러고는 또 밑으로 처방전이 생각나는 1일 회 일분, 취침 전·후 시분, 매일 몇 분씩 읽기 등이 프린팅 되어 있다. 봉투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 굉장한 아이디어의 주인공은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어서어서(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라는 이름의 독립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경주에 가면 그곳을 꼭 방문하는데, 갈 때마다 내부 인테리어 소품과 진열된 책들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오래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곳이다.
경주를 제대로 방문한 것은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였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하면 으레 경주가 떠오른다는데, 난 수학여행을 경주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경주로 여행을 갈 기회가 없던 내가 대구에 살다 보니, 경주와 포항은 이제 수시로 왔다 가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찾아 정리하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어느새 내가 경주의 사계절을 모두 보았다는 것이다. 그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경주의 벚꽃이었으니 이곳은 내게 꽤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도시다. 변화하지 않는 곳이면서 변화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경주는 서울의 어느 한 부분을 꼭 닮았다.
찬 기운이 돌던 아침과는 다르게 한낮은 따뜻하다 못해 살짝 덥기까지 하다. 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경주는 참 싱그럽고도 사랑스럽다. 여린 연둣빛이 점점 짙어지며 무성한 초록이 되는 모습은 내 기분마저 가볍고 산뜻하게 만든다. 그동안 내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이곳에서만큼은 기꺼이 내려놓는다. 신선한 풀내음이 내 코끝을 간질이자 이내 재채기가 터져 나온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따스하게 우리를 감싸며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토록 경주에 많이 다녀갔지만 아직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많이 남아있다. 그 언제 어느 때 와도 질리지 않는 이유다.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내가 대구에 남아 있는 이상 이곳을 계속 찾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와 함께, 또 때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혹은 나 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