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탈출
여행의 묘미는 일상의 탈출이다. 한번도 일주일 이상 집을 비워본 적이 없기에 특히 이번 여행이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언니의 제안이 없었다면 떠나지 못했을 여행, 그래서 열심히 구경하고 사진 찍었다.
유고연방 시절을 겪었던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니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 5개국을 두러보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모 방송국에서 크로아티아를 대대적으로 소개한 이후 우리나라 관광객이 급증했다 한다. 더위를 많이 타기에 여름 성수기 여행은 꿈도 못꾼다. 물빛과 초록빛이 아쉽긴 했지만 비수기 이기에 알뜰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3월 18일은 결혼기념일이었다. 해마다 별다른 이벤트없이 그냥 지나쳤기에 이날도 간단하게 샤브샤브를 해먹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차가 많이 막히긴 했지만 고속도로로 들어오니 씽씽 달렸다.
카타르 항공을 타고 도하를 경유해서 뮌헨에 도착했다. 장시간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 갖혀오느라 다리가 많이 아팠다. 그러나 낯선 풍광이 내 눈을 사로 잡았다. 알프스 산맥의 웅장함을 느끼며 첫 숙소인 슬로베니아 체르클예로 왔다. 산장형식의 숙소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잠자리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을 감상하며 주변을 산책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기분만큼을 상쾌했다.
첫 관광지는 블레드성이다. 호수 위 절벽에 있는 성을 관람하고 줄리안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블레드 호수와 호수 위에 있는 성당을 감상했다. 성당 종을 직접 쳐볼 수있는 기회도 있어서 좋았다. 배를 타고 들어가서 99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성모승천 성당이 보인다. 신혼부부는 신랑이 신부를 안고 이 계단을 올라가면 잘 산다고 한다. 성당 주변을 둘러보며 예쁜 야생화 사진도 찍었다. 이 날은 여행 기간 중 날씨가 가장 화창한 날이라 사진도 좋고 풍광도 멋졌다.
두번째 관광지인 포스토이나 동굴로 향했다. 세계에서 2번째로 긴 동굴로 20K이지만 5.2KM만 개방하고 있다. 꼬마기차를 탑승하여 입장하고 가이드를 안내를 받으며 도보로 구경한다. 헨리무어가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 언급했던 만큼 정말 장관이었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었다는 콘서트홀과 스파게티처럼 가느다란 종유석이 커텐처럼 흘러내린 스파게티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곳 기념가게에서 버섯모양으로 만든 호두까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구입 못한 것이 아쉽다. 크로아티아에 가면 싸고 많다고 해서 지나쳤는데 역시 물건은 있을 때 내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 깨달았다.
여행 3일차에는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중 가장 아름답고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폭포를 보러 갔다. 잔잔한 호수를 지나 자그마한 폭포를 봤을 땐 그냥 그랬다. 하늘빛도 흐리고 강물빛도 흐려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강 옆으로 나 있는 나무다리 길을 따라서 모퉁이를 돈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거대한 폭포가 흐르는 장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메랄드빛 투명한 녹색의 호수는 아니었지만 수량이 풍부해서 폭포는 너무도 멋졌다.
플리드비체 국립 공원을 감상한 후 제빨리 트로기르로 향했다. 거장 라도반의 아담과 이브가 로마네스크 현관을 장식하고 있는 성 로브르 성당, 나오르니 광장, 카멘르렌고 요새 등을 관광했다. 트로기르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달마티안 카운티의 아드리아 해안에 있는 도시로 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다. BC 3세기에 건설되었는데 중부유럽에서도 보존 상태가 우수한 역사지구로 교회, 탑, 궁전, 요새, 거주지 등이 밀집되어 있는 로마네스크 고딕 복합 지역이다.
다음 이동지는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의 은퇴 후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거대하고 웅장한 디오클레티안 궁전이 있는 스플리트이다. 1700년 전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성벽, 성당, 철문, 구시가, 마리안 공원, 마리안 해안 등이 유명하다.
여행 4일차에는 고대하는 두브로브니크를 관광했다.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프란체스코 수도원,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플라차 거리, 이탈리아 건축학자 버팔리니가 설계한 드브로부니크 대성당, 단아한 아름다운을 간직한 렉터궁전, 스폰자 궁, 시계탑 등을 감상한 후 화룡정점이 될 성벽 투어를 하고 곧이어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작은 버스로 나누어 탔다. 구불구불 산길을 조심스레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빨간 지붕과 아드리아 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연이어 나온다. 바람이 세서 넘어질 듯했지만 전망 좋은 곳을 잡아 사진도 여러장 찍고 동영상도 찍어 보았다. 정신없이 풍광에 취하느라 들고다니던 우산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아쉬움을 별로 없다. 해물스파게티를 맛나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코토르로 향했다. 몬테네그로에서 잘 보존된 중세도시인데 동유럽 최고의 피요르드가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었다. 1166년에 건립된 성 튀뤼폰 성당과 4.5km에 달하는 고대성벽이 멋있었다.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서둘러 보트를 타고 인공섬 위에 지어진 성당을 보러 갔다. 마지막 관광객을 기다리던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성당을 구경했다.
여행 5일차에는 성모발현지로 유명한 메주고리예 관광을 했다.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 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해발 200m 높이 산악에 위치한다. 이곳에 특히 청동으로 만든 예수님 상이 있는데 기이하게도 오른쪽 무릎에서 눈물만큼씩 성수가 흐르는데 이것을 아픈 이에게 건네주면 상처가 낫는다고 한다. 외국인 노부부가 냅킨 여러장에 정성스럽게 성수를 뭍혀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손수건에 성수를 정성껏 담았다. 비록 집에 올 때는 성수가 말라있었지만 그 의미를 말해주며 아들 팔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고해 성사를 하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교황님이 방문하셨다는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기도는 간절할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다음 목적지는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모스타르이다.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이 생생한 도시이다. 이 날은 비가 많이 내려서 관광이 실로 어려웠다. 세계문화유산인 터키식 다리인 스타리 모스는 이슬람교와 정교회 사이에 발생한 내전으로 폭파되기도 했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터키 식민지 시대를 거쳐서였는지 터키 과자와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예뻤다 좀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라예보는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로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다.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라틴다리와 자갈로 덮힌 터키인들의 거리 바슈카르지아, 이슬람 교도들의 안식처 가즈 하스레브베이 모스크, 사라예보 기독교의 상징 로마 카톨릭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한국인 유학생 가이드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훨씬 이해가 빨랐다.
여행 6일차에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이동했다. 이곳에선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베오그라드는크로아티아어로 하얀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유인즉 동로마제국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인들이 흰 벽돌로 성벽을 둘러 쌓았기 때문이란다. 트램이 달리는 거리와 보헤미안의 거리 스카다리아, 베오그라드의 중신 코네즈 미하일로 거리를 구경했다. 선거 유세기간이라 그런지 도시가 시끄러웠다.
여행 7일차에는 드디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이동했다. 네오고딕 양식의 첨탑이 이색적인 성 슈테판 성당을 구경하고 크로아티아의 영웅인 반 첼라치크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때마침 부활절이라 노천시장에는 다양한 부활절 상품들이 즐비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엔나로 이동했다. 가이드의 배려로 좀 일찍 출발하여 비엔나에서 2시간 정도 관광을 했다. 모차르트가 살았다는 집, 모차르트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함께 치렀다는 성당, 마차가 달리는 거리, 세계 여러 관광객이 북적대는 도시였다. 시간이 부족해서 비엔나에서 커피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언니랑 쇼핑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묘미는 일상의 탈출이지만 돌아갈 내 집이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시간 비행기 좁은 좌석에 앉아서 오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집에 오니 마음은 편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석조 건물들과 웅장한 성당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수공예품들 또 처음 보는 알프스산맥의 장관과 높은 성벽들 뜻밖에 얻은 황홀한 설경 등등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면 아침에 양치질을 하고 미지근한 지중해 바다를 만져보며 그 감촉을 느껴보았다. 날씨아 쾌청해야 에메랄드 빛 바다색을 볼 수 있는데 흐린 날씨라 그냥 바다색에 만족해야 했다. 벽돌을 구우면 빨간색이 되기에 곳곳에 통일성 있는 지붕이 보였다.
편서풍 덕분에 귀국길에는 비행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하지만 스릴 넘치는 비행은 좀 무서웠다. 콜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란 별로 경험해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