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느끼는 시즌 감성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즌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시즌 바인더는 11월 초부터 만들 계획이었는데 10월~11월에 캐릭터 바인더 주문이 너무 많았고, 간절하게 원하는 분들께는 몇 주가 걸려도 만들어서 보내드렸다.
그러면서 자꾸만 시즌 제품 디자인이 늦어지게 되었던 것.
지난주엔 내 브랜드만의 시그니처 바인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고 주말 내내 그 작업만 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11월 말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주 만들었던 4개의 레드 바인더는 예약 구매와 스토어 판매로 완판되었고, 어제 완성한 두 개의 그린 색상은 오늘 아침에 인스타에 피드, 한 개가 판매된 상태다. 다행히 2주 전의 내가, 온 방에 레진을 흘려 가며 몰딩 작업을 잔뜩 해놓았기에 지금 이렇게 맘 놓고 디자인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 부지런했던 2주 전의 나에게 감사!
크리스마스 바인더 디자인은 그야말로 '신명 나는' 작업이었다.
핸드메이드 브랜드 창업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주로 화려한 엔틱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인데, 평소의 다른 바인더를 제작할 때는 화려함의 수위를 많이 참는 편이다. 그래도 주 고객층이 30~40대 여성분들이셔서 나름 화려한 바인더들이 사랑받고 있다.
원래부터 쨍한 컬러감, 반짝이는 글리터들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레진 아트를 시작하면서부터 취향이 바뀐 것인지, 숨겨져 있던 취향이 드러나게 된 것인 지는 모르겠다.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울증이 극심했을 당시에는, 컬러라는 게 들어가 있는 옷은 거의 입지도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상담을 받기 시작하고, 단주를 하고,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면서 점점 예쁘고 화려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선명한 색감을 좋아하고, 반짝이는 글리터나 펄파우더를 보면 기분이 한껏 상승되는 인간이 되었다.
당시엔 느끼지 못했지만 일종의 미술 치료 같은 개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등학생일 때에는 친구들이나 선생님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거나 사서 손글씨를 눌러쓰곤 했었는데, 그런 들뜬 기분이었달까. 단골 몇이 있기에, 하나하나 디자인할 때마다 이건 어느 분이 가져가실 것 같다.. 아, 이건 그분이 좋아하시겠네..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 보았다.
위 사진처럼 디자인을 마친 바인더는, 표면 먼지를 가볍게 닦아 주고 위에 코팅 작업을 한다. 레진 아트 전문 용어로는 ‘도밍’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dome 형태로 둥글게 감싸준다라는 뜻인 듯하다.
도밍을 하게 되면 레진 자체와 디자인의 아름다움이 최대한으로 살아나게 된다. 깨끗한 볼록 렌즈를 한 겹 씌워준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충분한 화학반응이 시작되어 점도가 몽글해진 레진을 붓는 순간, 바인더 보드 안에 박힌 글리터들은 더욱 영롱해지고, 디자인하며 지저분해진 표면 긁힘, 굴곡 등은 마치 아무 상처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실링(sealing)된다.
거친 수작업의 흔적 가득한 바인더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켜 주는 도밍 작업.
이것이 모든 레진 작업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취미든 직업이든, 이 작업을 한 번 해 보면 레진 아트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며칠에 걸친 피로는 먼지 하나 없이 완성된 표면 광택으로 깨끗하게 회복된다.
(물론 제거되지 않은 먼지를 보게 되면 다시 앓아눕게 될 지도..)
새벽부터 조용히 오기 시작한 첫눈이 폭설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눈 오는 걸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1분 만에, 우산 없이 나와버린 걸 후회했다. 그래도 눈사람이 되어 들어온 카페 2층에서 커피도 마시고 작업 에세이도 쓰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하다. 아마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건 저녁 6시까지 일 것 같다.
오늘 저녁엔 기존에 출시했던 바인더를 다시 제작할 것이다. 한동안 크리스마스 바인더만 손댔던 터라 신선한 작업일 것 같다. 2주 전에 단골에게 부탁받았던 보라색 러블리 앤 바인더.
이왕 만드는 거 두 개의 다른 컬러로 제작해서 한 개는 아이디어스에서 판매해 보려고 한다.
평소 주문 제작은 받고 있지 않지만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한 달 안에 재제작을 해서 사진을 보여드리고, 고객은 완성품 사진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기한을 정하지 않는 예약'은 받고 있다.
사진을 보신 분들은 거의 구매를 선택하시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손을 타지 않은 새 제품이니, 스토어나 아이디어스에 전시해 놓으면 언젠가는 주인이 나타나 준다.
사진 공개 예약은 돈을 주고받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부담이 없다. 나는 기한을 약속하지 않지만 내 창작물들을 만들며 틈틈이 요청받은 작업을 할 수 있고, 고객도 선입금 때문에 전전긍긍하거나 닦달하지 않는다. 간혹 급한 마음에 먼저 입금을 하고 싶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런 경우엔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가까운 분들께 가끔 선입금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엔 돈 값(?)을 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작업을 진행하며 자유롭지 못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그 이외에도 다른 고객분의 릴스나 쇼츠의 언박싱을 보시고 한 달음에 다가와 문의를 주시는 분들께도 이런 서비스는 제공하는 편이다. 내가 만든 걸 사고 싶다 수줍게 부탁하는 첫 손님의 메시지는 감사와 함께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게 한다. 물론 처음 겪는 타인에게 경계심이 강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런 강박은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감정일 뿐이었다.
"스스로에게 상냥하기 작업"에 타인에 대한 경계와 불안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 당했던 경험을 생각해 보라는 둥, 촉이 좋지 않다는 둥 마음속에서 지껄이는 말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수면 위로 올리고 마음에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게 한다. 마음에 칼날을 품고 있는 건 아프고 거슬린다. 언제 스스로가 베일 지도 모를 일이니..
그래서 나는 얼마 전 새로운 룰을 만들었다.
"일어나는 일들과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환영하지도 않으며, 그냥 맞이하고 마주한다."
사람을 무작정 믿는다는 개념은 아니다. 어차피 삶에 있어 계획이란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마주하며 흐름에 맡겨 버리기로 한 것. 거기엔 잘한 것/잘못한 것, 옳은 것/ 옳지 않은 것 등의 개념은 없다.
폭설이 잦아들었고, 카페 바깥의 세상이 온통 하얗다.
눈을 잔뜩 맞고 걸어오길 참 잘한 거 같다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나 스스로를 따뜻하게 칭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