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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선배 Mar 11. 2024

[마음 독립 6] 자존감, 자존심, 자부심


초등학교 6학년, 이사 때문에 전학 간 새 학교에서 싸움 전교 2등에게 얼굴을 흠씬 맞고 입이 다 터져 피투성이가 됐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친구의 심기를 내가 먼저 건드렸음에도, 나는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그 친구는 힘도 없이 고집스럽기만 했던 나에게 힘의 정의를 손수 알려주었다.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자존감이 많이 낮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자존심이 냉큼 채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틱도 있었다. 그땐 그게 ‘틱’이라는 전문 용어로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내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이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중고 시절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했던 기억이 없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 후 본의 아니게 인싸가 되었다. 4월 첫 모의고사 후, 전교 10등까지 명단이 교무실 문에 붙었는데, 내가 무려 4등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초중교 시절 얼굴만 알고 데면데면하던 친구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초등학교 때 나를 줘팼던 그 친구마저 나에게 다가와 공부를 도와달라 했다.


인생을 잘 살 방법을 찾은 듯했다. ‘공부 잘하면 성공하는구나.’ 더욱 공부에 집중했다. 친구들에게 곁을 줄 시간을 아껴 공부만 했다. 점심도 일부러 늦게 먹었다. 급식 줄 서는 시간이 아까워, 공부하며 급식 줄이 줄어들 타이밍을 기다린 후 점심을 먹곤 했다.


운 좋게 수능 성적이 평소보다 잘 나왔고, 고려대 정시 모집에 우선 선발로 합격했다. 높은 수능 성적과 명문대생이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자존심 많이 사라졌다. 나보다 잘 생긴 사람을 봐도, 나보다 재밌는 인생을 사는 사람을 봐도, 가끔 내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도, 명문대 출신이니까 괜찮았다. 나는 그 자부심이 자존감이라 생각하며 20대를 살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학벌은 이제 전처럼 힘이 없다. 학벌 없이도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능력 있는 시대고, 학벌 상관없이 업무 성과 좋고 커리어 잘 쌓은 사람은 이직으로 연봉을 늘릴 수 있다. 이제 비교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던 학벌이란 방어막이 사라졌다. 마음이 공허했다.


그런데 외모든, 재산이든, 성격이든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그 인생은 가치가 없는 걸까. 남과의 비교를 배제해 본다면? 나라는 ‘인간’, 조금 폭넓게는 ‘생명’으로서 본다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두뇌,


묵묵히 있는 뛰고 있는 심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근육,


손 끝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


그 기관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들,


그 세포 하나하나 구성하는 정교한 세포 소기관들,


그 안에서 정해진 역할을 똑똑하게 해내는 단백질들,


그 단백질들의 설계도인 DNA,


이 모든 것의 총집합인 ‘나’


정교하고 복잡한 생명체로서 내 가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로 훼손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시대가 또 변해도 이 믿음이 변해버리지 않을 내 자부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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