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길 위에서 길을 찾다

제4장 다시, 흙으로 돌아와 길을 묻다

by 조영빈

3. 유럽의 농장에서 길을 발견하다


2019년, 나는 강소농 컨설팅의 눈부신 성취 이면에 드리워진 한계 앞에서 답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간절함은 나를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그것은 선진 사례를 배우러 가는 견학이 아니라, 내 삶의 다음 페이지를 열기 위한 고독한 순례의 시작이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날아오를 때,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내 삶과 내가 사랑하는 우리 농업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분명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 만난 농업의 두 얼굴

유럽에 도착한 둘째 날 새벽, 전날 밤 파리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다. 호텔 앞 빵집에서 새어 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가 이른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곧장 네덜란드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파리를 벗어나 벨기에를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는 끝없는 초원과 느릿하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햇빛에 반짝이는 유리온실이 한 폭의 유화처럼 펼쳐졌다. 그 풍경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알던 농업은 너무도 좁았구나.”


그때까지 농업을 단지 ‘산업’의 일부로만 여겼던 나의 낡은 관념은, 네덜란드 ‘토마토 월드’에 들어서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그곳은 단순한 재배시설이 아니었다. 글로벌기업의 데이터센터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작물 생장에 쓰고, 농장의 에너지를 다시 지역사회에 공급하는 완벽한 순환 시스템. 그 거대한 실험실 앞에서 한 관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구를 생각하며 농사를 짓습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추구해 온 농업은 지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효율과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 나의 농업은 이제 지구와 사람을 모두 살리는 길이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기술의 정점에서 받은 충격은 이튿날 방문한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 치유농장에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겉보기엔 소박한 그곳에는 80~90대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이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정해진 프로그램도,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도 ‘환자’나 ‘돌봄 대상’으로 취급받지 않았고, 그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의 ‘존재’로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진정한 치유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무언가를 ‘해주는 것(doing for)’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 회복할 힘을 되찾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making space for)’임을. 우리나라의 복지시설이 ‘대상자’를 중심으로 서비스를 설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네덜란드의 광활한 초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가을 햇살을 보며 확신했다. 이 여정은 단순한 견학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의 첫걸음이라고.


독일의 농장에서 발견한 것: 삶이 곧 치유가 되는 공간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유기농 목장, ‘Bio Hof Gensler’에 들어선 순간, 마음속에서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말이 절로 피어올랐다. 그곳은 단지 소를 키우고 우유를 짜는 생산의 장소가 아니었다. 직접 만든 치즈와 소시지가 우드오븐에서 구워지고, 방문한 가족들은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겼으며, 아이들은 목장 주변을 마음껏 뛰놀았다. 삶과 노동, 자연과 소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농장’이었다.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곳이 어떤 인위적인 설명이나 프로그램 없이도 완벽한 ‘치유의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친절히 안내하지 않아도, 공간 자체가 지닌 고유한 삶의 리듬과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러한 깨달음은 다음 날 찾아간 안덱스 수도원의 허브 가든에서 다른 결의 감동으로 이어졌다. 수도사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허브 정원은, 아이들이 만든 천연비누와 수공예품을 파는 작은 가게와 어우러져 조용한 돌담 안에 자리했다. 그곳에서는 일과 기도, 자연과 인간, 쉼과 창조가 거대한 하나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흐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한국의 현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왜 치유농업을 늘 ‘서비스’나 ‘사업’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걸까. 독일의 농장과 수도원이 내게 조용히 가르쳐 준 것은 명확했다. 진정한 치유란 거창한 구호나 잘 짜인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간, 자연의 속도에 내 시간을 맞추고, 누구에게도 평가받지 않은 채 온전한 나로 머물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치유가 있었다.


이탈리아: 유산과 자연의 균형에서 배운 ‘느림’이라는 가치

밤기차를 타고 도착한 베네치아의 새벽, 나는 기차역 앞에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수면을 고요히 미끄러지는 곤돌라, 수로를 사이에 두고 천 년의 시간을 마주 보는 낡은 건물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아주 낯설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자연과 유산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세월 속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스며든 까닭이었을 것이다. 도시는 더 이상 확장하려 애쓰지 않고 유산은 제자리를 지킨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간다. 작은 광장마다에는 커피 한 잔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깨달았다. 치유란 결국 삶의 속도를 늦추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 깨달음은 남부 살레르노를 지나 로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산등성이에 기댄 집들과 빽빽한 올리브나무 숲은 ‘무엇을 새로 짓는가’보다 ‘어떻게 곁에 남겨두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유산들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흐르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트레비 분수 앞 인파 속에서, 콜로세움의 거대한 아치를 올려다보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왜 치유농업마저 그토록 서둘러 실적과 숫자의 언어로 증명하려 하는 걸까? 이탈리아의 느림은 결코 비효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깊은 축적의 힘이자, 삶을 대하는 단단한 태도였다. 그들의 농업이 단지 ‘생산’을 넘어 ‘관계’와 ‘풍경’의 조화로 느껴졌던 이유다. 수천 년의 시간과 공존하는 이탈리아의 풍경 전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서두르지 말아라. 가장 깊은 치유는 평가나 증명이 아닌, 함께 머무는 느린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돌아오는 길, 씨앗을 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묵묵히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짧지만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던 11일. 그 길 위에서 나는 더 이상 단순한 여행객이나 견학자가 아니었다. 내 안에 단단한 씨앗 하나를 품고 돌아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럽의 농업은 내게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빨리 자라지 않는 작물을 기다려주는 시간, 노동이 아닌 산책처럼 이어지는 하루, 그리고 어떤 말도 없이 존재만으로 위로를 건네는 공간의 힘. 그 모든 것이 나의 조급했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돌아가서 어떤 삶을 그려야 할지 또렷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나는 이제 농업을 수익 창출의 시스템으로, 치유를 정책의 틀에 맞추려는 사람이 되기를 그만두려 한다. 그 대신, 함께 흙을 만지고 갓 지은 밥을 나누며,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환대가 되는 공간을 만드는 실천가로 살고 싶다.


물론 내가 돌아온 한국의 농촌은 인구가 줄고 마을은 늙어가며, 돌봄의 손길마저 희미해지는 현실과 마주해 있다. 하지만 희망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 희망은 이름 없는 밭에서 시작될 수 있고, 온기 넘치는 마을 부엌에서 피어날 수 있으며, 작은 벤치 위 허브 향기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나는 고향에서 그 첫 씨앗을 심으려 한다. 유럽의 철학을 그대로 옮겨 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간과 사람, 우리의 문화와 감성으로 정성껏 번역해낸 치유농업. 바로 ‘한국형 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PCC)’의 첫걸음을 이제 막 내디디려 한다.


[스승을 떠나 새로운 스승을 만나다]

돌이켜보면, 4장의 여정은 내가 스승을 떠나 또 다른 스승을 만나는 과정이었다. 나의 첫 번째 스승은 '강소농' 농부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경영을 가르치려 했지만, 오히려 흙으로 다져진 지혜 앞에서 겸손한 학생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웃고 땀 흘리며 '더불어 잘 사는 농업'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강한 농부'는 만들었지만,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다. 그 성공의 정상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그 깊은 갈증이 나를 두 번째 스승, 유럽의 '치유농장'들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나는 경쟁이 아닌 협력을, 이윤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는 완전히 다른 농업의 풍경과 마주했다. 한국의 농부들이 내게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현실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면, 유럽의 농장들은 '왜(Why)' 해야 하는지, 농업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과 공동체의 회복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그 순례의 길 끝에서 돌아와, 비로소 나의 길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강한 농부'를 만드는 컨설턴트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치유하는 농장'을 만드는 실천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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