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기억, 일화 기억
기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억의 원인과 그 흔적, 결과가 모두 기억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유전자 자체가 기억의 집합체다. 내 생김새, 지문, 목소리, 상처 등. 모두 다 기억이 원인이 되어 만들어 낸 기억의 결과물이다.
치매가 무서운 질병이 이유는 그 사람의 '그 사람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기억 중에서 생김새, 지문,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치매로 없어진 '그 사람다움'은 그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었을 '사실 기억'과 '일화 기억' 같은 것이다. 그래서 치매를 끔찍한 병이라 한다.
휴대폰에 비유하면, 조금 전까지 내 폰이었지만 공장초기화로 메모리가 나 지워진 폰과, 아직 내 손으로 만져본 적도 없지만 이전 폰에 있던 사진과 동영상이 옮겨져 저장된 새 폰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내 휴대폰으로 여겨질까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렇듯, 내 폰을 내 폰을 진정 내 폰답게 하는 저장된 사진과 동영상 중 최초의 것이 있듯이, 내 기억 속에도 그런 최초의 사진과 동영상 같은 기억이 있다.
사진에 해당하는 나의 최초 기억은 3~5살 즈음에 살았던 집의 파란색 대문이다. 평범한 대문이지만 다른 집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내가 그 문의 손잡이에 매달려서 놀았던 촉감과 함께 기억하기에 분명히 우리 집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그리고 집 마당에 닭을 몇 마리 있었고, 채송화, 붓꽃 같은 어머니가 가꾼 화초들이 있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비교적 평범한 사실기억에 비해 내 인생 최초의 일화 기억은 좀 특별하고 강하다. 명백한 '도. 둑. 질.'의 기억.
나에게는 학령 상으로 14년 터울의 형과 6년, 3년 터울의 누나들이 있다. 태어난 나이보다 학교에 언제 들어갔느냐가 더 큰 영향을 끼치기에 학령 차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형은 교대(당시 2년제)를 졸업해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입학하던 해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같은 학교는 아니고 거리가 꽤 멀었다. 나이 차이가 커서 형과 어린 시절을 공유할 수는 없었고, 형의 방에 있던 책들과 악력기, 쌍절곤 같은 운동 기구들로 기억된다. 그래서 학교에 입학하기 전(유치원에 다니지 않았으므로) 같이 놀 친구는 몇 살 많은 누나들 또래였다. 누나들이 하는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같은 것을 하며 놀다 보니 남자 애들이 하는 놀이(딱지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등)는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누나들 따라다닐 때, 어느 날 골목의 끄트머리에 있어 옆은 뻥 트인 공터인 구멍가게를 지날 때였다. 누군가 다소 긴장된 말투로 무언가를 계획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대충 '가게 앞에 진열된 과자를 집어 들고 튀어라.'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들에겐 그냥 '따라다니는 꼬마'였으니 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나도 별 생각이 없던 때였다. 작은 누나도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난 5살 전이다.
신호가 떨어지자 난 금메달 모양 초콜릿을 들고 튀었다. 동전 모양으로 된 초콜릿에 금박지를 씌운 과자인데, 매대 가장 앞에 있어고 내가 한 손에 쉽게 잡을 수 있어서 그것을 집었던 것 같다. 내가 그것을 탐내서 자발적으로 한 도둑질이 아니라는 변명이지만, 난 그렇게 부피가 작은 먹을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 초콜릿 맛도 아니고 색과 향만 비슷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에 내가 좋아하던 과자는 뻥튀기처럼 부피가 크게 부풀려진 먹을 것들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고 뛰어가자 가게의 주인아주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뒤 쫓아왔고 가장 작고, 어리고, 서툰 내가 먼저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내 손을 빠져나간 초콜릿을 아주머니가 주어가시면서 '다신 그러지 마라.' 정도의 말만 하고 가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때리거나 심한 질책은 없었다. 그래서 아주머니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고 오히려 고마운 분이셨다는 기억이다.
이 일화 기억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기에 트라우마 같은 최초의 기억이 됐을까? '도둑질', '부끄러움'같은 평범한 교훈이 하면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잊혔을 것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 삶이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손금이나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고 최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일화와 연관이 있을 법한 내 특징 중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어려서부터 금색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어릴 때 집에 세수 대야가 두 개가 있었는데, 나는 은색 세숫대야를 쓰려했었다. 어릴 때 나는 금색과 은색을 거꾸로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있었을 때는 금과 은을 전혀 몰랐고, 나중에 금과 은은 늘 같이 언급되면서 실물을 모른 체 금이 은보다 좋다는 것만 알았다가, 누르스름한 색(금색) 보다 환한 밝은 색(은색)이 좋아서 은색을 금색으로, 금색을 은색으로 알았다. 꽤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 '넌 왜 금색을 은색이라고 하니?'라는 말을 했을 때야 내가 반대로 알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은이 금보다 전기 전도도가 높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 역시 은이 더 좋은 것이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며 쾌재를 부르며 뿌듯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것을 사소한 것이고, 내 삶에 진짜 큰 영향을 준 것은, 나에게 '명령하는 것 대한 반감'이다. 사건의 시작이 '들고뛰어!'라는 명령을 아무 생각 없이 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서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따르면 낭패를 본다는 것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면서, 내가 동의할만한 설명 없이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면 즉시 반감이 솟구치게 되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이 기억과 명령어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생기는 반항심 사이의 관계를 연결 짓지는 못했다. 사춘기 때 이유 없는 반항이 어려서부터 평생 가는구나 정도로만 여겼다.
반골 기질이라면서 평범하게도 볼 수 있겠지만 나는 분명 좀 심하다. 어머니가 인사처럼 하는 말, "차조심해라.", "술 많이 마시지 말아라."같은 단순한 명령문에도 불편해지는 것을 보면, 자아보다 더 깊은 초자아의 영역에 명령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은 듯하다. 전통과 관행을 따르는 것도 나에게는 '명령'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별 것 아니라도, 이유가 불분명한데 남들이 다 그렇게 알고 따르는 것은 꼭 근원을 따져본다.
예를 들어, '오마카세'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대충 '일식집 고급 코스 요리' 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나는 어원과 유래 등을 확인해 본다. 그러고 나면 남은 식재료 처리용인 말이 우리나라에서 엉뚱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 불편해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어 뜻을 확인하고서도 잘못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옛날에 '손대지 마!'라는 의미로 '노터치(No touch)!'라고 한 것을 '노다지'라고 한 과 비슷한데, 당시는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이해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검색이면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는데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결론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부터 세상이 시키는 것을 생각 없이 따르지 않게 되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국룰'이니 하는 말 어이가 없다.
이래서 어려서나 나이 든 지금이나 X세대 소리를 듣는다.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교실 이데아> 서태지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