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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가꼬 Dec 18. 2023

공포체험이었던 나의 첫번째 여행

중국 베이징


여행


1975년~~

햄버거 세대, 수능 1세대, IMF 세대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니는 세대~

자녀 학비와 내 집장만이 1순위로 여겼던 부모를 둔 세대~

여행이란 단어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세대~

여행하면 소풍이나 수학여행, 관광버스, 박물관이

먼저 떠오르던  세대~

방학이면 외갓집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오징어~땅콩 있어요~" 외치는

열차 직원을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세대

나는 그시대를 살았다.


누구에게나 설레던 여행이란 단어는

나를 유일하게 설레게 하는 단어로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여행이 아직도 사치라는 생각이 남아있을 때쯤

나는 처음으로 나 홀로 해외여행을 준비했다



출장~


직장 생활에서

승진이냐? 삶의 질이냐?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질 때쯤 서울로 4주간 교육을

떠날 기회가 생겼다

일상을 잠시 멈추고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와

책도 읽고, 그동안의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치고 산 것은 없는지? 이런저런 사색의 시간도 가졌다

교육 중 우연히 듣게 된 한 유명 대학교수의

특강 시간~ 미래의 세계를 주도하는 경제 패권이란 제목의 강의는

향후 세계에서 중국이 차지할 경제적 위상과 역할, 잠재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온 나는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내가 집중해야 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은듯했다



중국



그렇게 얼마간 학원을 다니며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학창 시절 영어를 공부할 때처럼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단어장과 숙어 잔을 만들어

근무시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외웠다.

1년쯤 중국어를 배웠을 때였다

내가 배운 중국어로 중국 사람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게 내가 난생처음 중국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이유였다


짧지만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에

첫 해외여행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여행작가도 블로거도 없었다



첫번째 해외여행



인터넷과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여행을 준비했다

총면적 세계 4위의 대국인 중국

경제 개혁과 개방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직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넘어야 할 산은 많아 보였다


당시 외국인에게는 4성급 이상의 숙소에서만 숙박이 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이었고, 항공과 호텔, 천안문 광장, 만리장성, 왕푸징 거리 등 세계적인 관광지에서도 손님을 맞이하는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굳어있었다.


숙소로 가는 택시 안에서 유일하게 웃으면서 나를 대해준 한 운전기사가 생각난다. 그는 숙소에 도착한 후 기념촬영을 해보라며 운전석까지 내어주는 적극성을 보였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중국에 머무는 동안 내가 느낀 솔직한 감정들이다



1년 동안 배운 첫마디


워낙 나라 면적이 커서 자국민들 사이에서도 방언이 심해 대화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는 중국은

이후 북경어라는 표준어 정책에 따라 공무원을 주축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고 했지만

베이징 방언인 "r"발음이 너무 심해 모든 것이 같은 발음으로 들렸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중국 전통 서커스 극장인 조양 극장~

그곳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70년대 대한민국의 시내버스에서 보던 안내 양이 뒷문에서 손님들에게 일일이 목적지를 묻고 버스 요금을 받고 있었다


용기를 내서 안내 양에게 조양 극장으로 가려면 어디에 내려야 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막 화를 내다, 여러 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반복하더니 빨리 내리란다. 놀라기도 했지만 안내양 누나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고, 순간 버스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모다 바리라도 당할까 봐 우선 급하게 쫓겨나듯 내렸다






이국땅 버스정류장에 홀로 버려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은편 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조양 극장이란 표지가 보인다. 그렇다 조양 극장은 반대편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내가 경험한 베이징


내가 느낀 중국의 베이징이란 도시는

자기 나라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처럼 관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알던 바로 그 중화사상이었다.


하루는 왕푸징 거리를 찾았다

tv에서 많이 보던 곳이라 일정에 넣었다

그곳은 책상다리 빼고 네발 달린 것은 다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전갈부터 거미, 불가사리 튀김에 해마까지

구워서 꼬치에 꽂아 먹었다.


꼬치에 놀라 공포체험을 마치고 뒷걸음질 치던 그때 예쁘장한 꼬마 여자아이가 인민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고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잘 쓰지 않는 작은 동전을 몇 개 주며 같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하던 순간!! 아악~~


언제 모였는지 주변에 걸지 떼들로 가득하다

내 옷을 잡고 늘어지는 1선에는 모두 아이들이고

2선에는 그 부모들이 나를 에워쌌다.

모두 하나같이 외친다 "give me money"


나는 그길로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뿌리치며 무작정 한쪽으로 달렸다. 달리는 길 양쪽에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사람들 중에는 발이나 팔 한쪽이 없는 사람들이 나를 더욱 빨리 달리게 만들었다.



공포체험


한참을 달려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렸다

정류장은 잠시 후 나를 또 다른 공포체험장으로 만들었다.

어느새 해가지고 캄캄하게 변한 정류장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들로 가득 찼고,


가벼운 입맞춤에서 시작해서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시선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돌아온 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막기 위한 산하 정책으로 인해 부부 증명 없이는 함께 숙박업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혈기 왕성한 연인들은 그렇게 늦은 밤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로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 다름의 의미와

계획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내 삶의 가장 큰 가치를

여행에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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