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픽업과 이삿짐 정리
호주에 도착해서 5박 6일을 묵기로 했던 에어비엔비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1월 20일 오전 10시에 체크아웃해서 중간에 부동산에 들러 집 키를 픽업하면 언제든 입주가 가능했는데, 문제는 정말 그놈의 짐이었다. ㅎㅎㅎ
원래 나의 계획은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트램을 타고 집까지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부동산 매니저에게 키를 픽업하는 시간을 11시로 잡았었다. 그런데 며칠 멜버른을 돌아다니며 시내에서 트램을 타보니 그 많은 짐을 들고 타기엔 트램 내부도 좁고 사람도 많아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이민가방 하나는 부피도 크고 무거운데 바퀴까지 고장 나 정말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유학원에 문의하기로 했다. 일부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면 짐 픽업을 도와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중간에 집 열쇠를 받으러 부동산에 들르는 것도 도와주기로 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건물 앞에서 체크아웃 시간인 10시에 강대표님을 만났다.
- 오? 짐이 정말 없으시네요?
우리 짐 싣는 것을 도와주며 놀란 듯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짐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것에 두배로 가져온다고 했다.
- 부동산까지는 멀지 않네요. 차로 한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런데 11시에 만나기로 하셨다고요? 아마 지금 가면 절대 출근 안 했을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가보죠. 11시에도 못 만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물론, 우리가 어쩌다 보니 약속한 11시보다는 조금 이르게 가긴 하지만 그래도 10시 30분이면 키 픽업이 가능하겠다 싶었는데, 강대표는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며 호주 사람들의 느긋한 문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동산에 도착한 건 10시 30분쯤이었는데 매니저를 만날 수 없었다. 별 다른 방법이 없어 기다리기로 했다. 한 25분쯤 기다렸을까, 그래도 11시가 되기 직전에 매니저를 만나 키를 받을 수 있었다.
매니저는 중국사람이었는데 그분이 사용하는 영어를 알아듣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에어비앤비 주인도 중국사람이더니 내가 살 집의 주인도 중국사람이었고, 부동산도 중국업체였다.
강대표에 의하면, 호주에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고 특히 부동산 업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는데 대부분 중국 본토가 아닌 화교출신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키를 받고 집으로 향했다. 짐을 얼른 던져놓고 당장 허기진 배를 달래러 점심부터 먹으러 가고 싶었는데, 대표는 우리 보고 집 사진부터 찍으라고 했다. 이상 있는 부분이나 수리가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나중에 집 계약이 끝나고 나올 때 문제가 될 수 있어서 렌터카 사진 찍어놓는 것과 같은 의미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Condition Report라는 서류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리포트는 집주인이 계약 당일 집상태를 보고 체크한 내용을 세입자에게 보내면 동의하는지 아니면 사실이 아니라 다른 상태인지를 입주하며 적어두고 추후 문제가 없도록 작성하는 서류였다.
그렇게 거의 100장이 되도록 집구석구석 사진을 찍고 나니 더더욱 배가 고파졌다. 동네 탐방도 할 겸 집 주변을 둘러보다 이전에 살던 분에게 추천받은 베트남 식당에 들렀다.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짐정리를 시작했다. 나와 제제 둘만 살 집이기도 하고, 평소 생활하는 짐에 비하면 소박하다 싶어 금방 정리가 끝나겠지 싶었는데 웬걸, 정말 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이민가방을 하나씩 풀어 수납공간에 짐을 정리하고, 저녁 먹을거리도 장 봐와서 저녁도 해서 먹고, 밀린 빨래도 돌리고 나니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지금 멜버른은 여름이라 9시쯤 해가 진다.)
제제가 집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한국에서 쓰는 알레르기 방지 이불을 정말 챙겨 오고 싶었는데 짐에 치이다 보니 결국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입주해서 차를 쓰면 인근 마트라도 가서 바로 이불을 사 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짐 정리하다 보니 하루가 다 지나버렸다.
우선은 아쉬운 대로 이전에 살던 분이 놓고 간 여름이불 한 세트가 있어 그걸로 덮고 자기로 했다. 짐을 챙겨 왔는데도 뭐가 이리 필요한 살림들이 많은지.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이케아가 있어 내일은 당장 거기부터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호주의 공립학교들은 대부분 교복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제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교복을 입는다. 그래서 내일 오전에는 먼저 교복을 사고 그다음에 이케아에 가서 점심을 해결 한 뒤 쇼핑을 하기로 일정을 짰다.
그래도 그동안 내내 아침저녁엔 선선해서 저 얇은 이불로 어찌 버티나 했는데 이사 온 오늘은 33도까지 올라 밤에도 은근히 더워 다행이다.
얇은 이불 위에 살포시 무거운 몸을 뉘어본다. 이렇게 우리가 살 멜버른 보금자리에서의 첫날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