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가족 입니다.
마음이 간질 거릴 때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이 어지럽고 슬프기도 해서 선뜻 들여다 보기 겁이 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게 되어 감사하다. ^^
결혼하고 뭐 하나 맞는 것 없는 시댁이라
생각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변하지 않는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세월을 보내면서 익어간다. 저마다 어떻게 익어갈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익어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해되기도 하고 서로가 조금씩 인정되어 가기도 한다.
가족 행사가 있을 때 시댁 식구들과 식사하는 자리가 마냥 편할 수만은 없었다. 약간은 불편하고 어색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고 각자의 인생을 응원해 주는 마음들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리로 점점 익어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의 황금연휴가 다가왔고 어버이날과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저마다의 식사 자리가 식당마다 풍성했다. 애들을 데리고 남편과 나도 시댁으로 향했고 올해는 고깃집으로 모이기로 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남편은 사랑하는 딸이(사랑이) 학교를 가기 위해 다음 달에는 출국해야 된다는 말을 애써 아주 쾌활한 척 웃으며 했다.
그렇다 징그럽게 속을 썩였고 지독히도 사랑한 딸이 20시간은 비행을 해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시어머님은 그때부터 입맛이 없다며 젓가락을 놓으셨고 정 많은 시누이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님뿐만 아니라 시누이도 사랑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그녀의 화장대 위에는 당신의 아들도 딸도 아닌 사랑이 사진이 떡하니 올려져 있다. 몇 번의 이사를 했는데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옆에 앉은 사촌언니는 사랑이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말수가 한참 적은 큰 아주버님은 갑자기 분위기가 장례식장이 됐다며 자기 인생을 도전하는 첫 발걸음을 축하한다고 해주었다. 시어머님은 축하한다고 해줘야 할지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되는 마음으로 사랑이를 말없이 내내 바라만 보셨다.
차라리 너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하니 등등의 잔소리 같은 말이라도 하셨으면 마음이 좀 덜 할 텐데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어머님 눈빛이 그렇게 아픈 날도 처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걱정되어 어머님 옆을 지켰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잘 해낼 거예요."
"우리 며느리 팔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을 건데 어쩌냐"며 까맣고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셨다.
그 마음이 감사하고 애잔하고 슬펐다.
오로지 부모의 힘으로만 키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는 동안 할머니와 고모, 언니, 삼촌 가족들의 사랑을 충분히 느꼈으리라. 그리고 그 사랑이 새로운 땅에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뿌리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사진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