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eo Jan 03. 2023

(아마도) 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

01 

내가 창원 사는 할머니와 정상적으로 대화해본 적은 작년 설날이 마지막이다.

그때만 해도 창원 친척들과 같이 온 할머니는 너무나 정정했다. 가족끼리 전어회에 소주 한 잔 할 때도 끼어들며 특제 초장을 가져오셨고(솔직히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일하다 단짝을 만나 결혼한 사촌여동생한테도 덕담 한 사발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막 군대 전역한 언양 사촌동생한테도 세뱃돈이라고 한두 푼 쥐어주기도 했다.

그날 뒤로는 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없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컵라면도, 소주도, 부모님 보러 갈 차비도 오르는데 매거진 마감은 하루가 당겨지고 월급은 수줍기만 한 세상 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못 견디다 다른 곳으로 옮기고, 손 대신 대가리로 삽질해가며 1달 가까이를 버티던 무렵이었다.

생일 다음날, 엄마가 갑자기 형제들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병원 계신 할머니가 올해를 못 넘길 것 같다는 소식을 창원 친척들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평소 작은어머니 하는 말에 엄청난 신뢰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결국 나는 새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부모님 찾아 순천으로, 부모님, 먼저 내려왔던 동생과 함께 창원으로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창원에서 출근하고 일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문의할 게 있으면 구글에서 찾고 전화로 물어보면 되는 직업의 몇 안 되는 장점이랄까.


02

할머니가 계시다는 요양병원은 창원의 중심…에서 살짝 떨어진 동네 앞산에 있었다. 병원의 외관만 보면 제법 근사했다. OO요양병원 대신 XX대학교라고 하면 학창 시절 고등학교나 대학교보다 훨씬 나은 건물이었다. 물론 이 건물은 요양병원이었다.

요새는 엔데믹이니 뭐니 해서 어느 나라 빼고는 코로나 따윈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느낌이지만 요양병원은 달랐다. 우리 가족 4명과 창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부산 빵집에서 황급히 달려온 사촌동생이 병원에 왔는데, 7명이 한 번에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2인 1조로 나눠서 할머니 있는 병실로 가야 했다.

할머니를 만나려면 코로나 검사도 필요했다. 병원에서 전달한 면봉으로 코를 쑤신 다음 용액에 면봉을 담그고 용액을 검사 키트에 3방울 정도 떨어뜨린다. 2~3분 있으면 한 줄인지 두 줄인지 나오는데 그걸 병원 입구의 간호사에게 전달해 준다. 공식적으로는 10~15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방문객이 대충 음성인 걸로 판명 나면 외투를 벗은 다음 손에 비닐장갑을 쓰고, 몸에는 하얀 앞치마 비슷한 걸 두른 다음 머리에 투명 페이스실드를 써야 한다. 마스크는 당연하다. 그 모습을 엘리베이터 거울로 보다 보면 내가 폴가이즈 속 캐릭터(화이트 에디션)가 된 것 같다. 물론 여기는 즐거운 게임 세상이 아닌 너무나도 지루한 현실 속 병원이다.


03 

가장 먼저 할머니를 뵌 것은 엄마와 나였다. 병원에서 안내해준 대로 2층으로 올라가 222호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할머니는 살아계셨다. 하지만 그 모습은 할머니라 하기에는 너무나 다르고 처참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설날까지 내가 알던 할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날까지의 할머니는 아흔 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풍채가 상당하고 얼굴살도 상당했다. 하지만 12월의 할머니는 살집이 그때의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앙상한 팔다리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저 코에 꽂힌 호스 속 공기를 들이마시며 어 어 하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이전부터 간간히 할머니 소식을 들어왔던 어머니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이젠 하시는 말의 0.1%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를 할머니 곁에 그래도 아들들 모두 장성해서 밥벌이하고 있다고, 더 이상 고통 없이 극락왕생하실 거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이상으로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이 정말로 충격을 먹으면 두개골 속이 텅 비어 버려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어머니가 울음을 참고 할머니께 (아마도)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에 나 역시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앞으로 잘 살아갈게요 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약 10분간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후 엄마와 나는 병실을 나왔다. 나는 1층 로비로 돌아갔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이 할머니를 만날 때 할머니가 누가 왔는지 모를까 걱정했던 까닭이다. 

04

할머니에 사실상 작별인사를 건넨 우리 가족과 창원 친척들은 송년회도 할 겸 오래간만에 이야기도 터놓고 나눌 겸 친척 집 근처 횟집으로 갔다. 모둠회 대자를 시켰는데 계절생선이라고 방어랑 돔이 한 사발로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오랜만에 서울 사는 아들내미들이 경상도에 왔다고 옛 마산의 자랑 화이트소주도 시켰다. 

횟집에서 남자 한 명당 소주 1~2병 정도 마신 뒤에 가족들은 또 마셨다. 역시 옛 마산의 술 하이트맥주에 과자랑 과일 몇 개가 안주로 나왔다. 아직 병상에 계신 할머니는 좀 서운할 수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예전에 봤던 스페인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안락사를 택하기 전에 가족들끼리 만찬을 하며 회포를 풀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날 자리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할머니를 뵙던 나로서는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기 쉽지 않았다. 아마 할머니 인생의 1%도 몰랐을 거다. 그날 들은 이야기를 통해 1%를 한 10% 정도로 늘릴 수 있었다.


05

아무리 할머니에 대해 모르는 나도 할머니가 울릉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울릉도에서 꽤 금수저 집안이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울릉도 군의원을 했다나 뭐라나. 이 때문인지 아버지는 우리 가족은 정치는 죽어도 못 할 거라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50년대 들어 갑자기 할아버지와 눈이 맞아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그때 당시 상고를 나와 머리가 좋았는데(그때는 어중간한 대학 갈 바엔 상고 가서 일찍 돈 만지는 게 나았던 시절이다), 글도 잘 쓰고 인물도 크고 손재주도 좋고… 아무튼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우체국이라는 안정적인 직장도 있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병역기피자였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어찌어찌 넘어간 모양인데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생겨나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막 태어난 군사정권은 민심 기강 잡는다고 깡패며 부랑자며 잡아다가 조리돌림을 하곤 했는데 병역기피자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덜컥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결혼한다 했을 때 울릉도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세 아들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독하게 일하며 아들들을 키우셨나 보다. 뭐 그래서 아들들은 다들 어디 가서 굶지 않고 자식들을 키워냈으니 좋은 게 좋은 걸까.


06

그렇다면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아주 솔직하게, 보편적인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할머니를 가장 오랫동안 모셔온 작은어머니에 따르면, 할머니는 늙어서도 귀티가 나고 머리가 상당히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세상 평하는 것에 번뜩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 머리를 웬만한 사람들이 박수 칠만한 일에 썼다면 좋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젊었을 적에 사채꾼이었다고 한다. 뭐 홀어머니 먹고살자고 하는 것이라 평할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한테서 돈 빌린 사람들이 그이를 좋게 봤을지는 모를 일이다.

자식과 며느리에게도 할머니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말년에 할머니를 집에서 모시고 살다시피 했던 창원 식구들에게 그랬다. 창원공단에서 일하시던 작은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 동안 한쪽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도 작은어머니를 타박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게도 할머니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술 취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창 싸울 때도, 내가 청춘의 방황이랍시고 엇나가기만 했던 때도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대학교 2학년 마치고 고향에 올 때부터 부처님께 그렇게 의지했나 보다.


07

어떠한 의미로든 할머니는 참으로 독하게 사셨던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년배 다른 친척들보다 오래 살았다. 심지어는 언제나 정정해 보였다. 아흔 살이 되어서도. 그랬기에 개인적으로는 죽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미련 없이 떠날 줄 알았다.

사실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작년 6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토록 비상한 뇌도 제 기능을 못할 때 사람이 산송장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니 사람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렸다.

08

다들 할머니께 사실상 마지막 인사를 전했을 무렵 담당 의사는 아마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저녁에 한잔 두 잔 걸칠 무렵에도 가족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할머니는 살아계셨다.

그리고 다들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음 주에 서울 출근해야 했던 나는 직장에 연락하고 밥 한 숟갈 못 뜬 채 기업 신년사를 처리해야 했다. 어떤 기업은 30일에 신년 계획을 발표할 만큼 성미가 급했다.

올해 정년퇴직이 예정된 아버지는 회사에서 후임들 교육해야 해서 창원 친척들과 인사하고 순천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도, 나도, 동생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순천에서 2022년의 마지막과 2023년의 첫날을 보내고 자식들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할머니는 살아계셨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직 숨을 놓지 않은 것 같다. 아직 남은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설날까지는 남은 가족들끼리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바람 때문일까.


09

지금 이 시간에도 남은 가족들은 할머니와의 영원한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할머니와 다시 멀리 떨어져서 생각해 보는 지금, 할머니는 남은 가족들에게 그리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들 모두 할머니와의 작별을 슬퍼했다. 평소 할머니 상대로 말 한마디 없던 아버지도, 할머니와 한때 다툼이 잦았던 어머니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던 창원 식구들도 할머니의 (어쩌면) 마지막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이 글은 모두들 곧 세상 떠나는 할머니를 위로해주고 걱정해달라고 쓰는 글은 아니다. 단지 한평생 시무룩하게 지내던 사람임에도 죽음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지는 순간이 있음을 기록하고 싶을 뿐이다. 그만큼 한 사람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p.s. 김복남 할머니는 2023년 1월 110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