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를 위해서 자연 보호 운동을 하기에는 내가 충분히 타의적이지 않다.
나는 환경 보호 운동에 대해 비관적이다. 내가 이산화 탄소의 방출을 줄이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혹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에코백이나 텀블러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현재 지구가 파괴되고 있는 속도에 아주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나 하나 쯤이야"를 타도하는 "나 한명이라도" 캠페인도 초등학생과 어울리는 귀여운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 한명이라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딸에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 속에서 지구를 위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열개 쯤 된다, 예를 들면:
- 일회용 랩 대신 비즈왁스랩을 사용하는 것
- 잘 분해되는(biodegradable) 쓰레기 봉지를 사용하는 것
- 생필품을 대량공동구매하고 공용하는 것
- 채식을 하는 것
- 중고가게에서 옷과 생활 용품을 사는 것
- 자전거와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
- 세탁 세제나 주방 세제를 리필해서 쓰는 것
- 야채를 기르는 것
- 물통과 면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
- 면기저귀를 사용하다가 실패한 것
- 음식을 얼리지 않는 것
15년-20년 전, 여느 날처럼 과자와 플러스 알파를 사려고 동네 슈퍼로 달려갔다. 진열대를 스캔하는 즐거움을 조금 가진 후 질소가 빵빵한 과자 봉지를 가지고 계산대로 갔다. 슈퍼 아줌마는 언제나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얇은 검정 비닐 봉지를 벌려 나의 아이템을 넣어 주시곤 했었는데, 그날 아줌마는 말씀하셨다.
"비닐 봉지는 앞으로 50원 내고 사야된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시작된 지속가능성* 운동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슈퍼에서 물건을 2개 이상 살 일이 없는 나이였고, 편리하게도 나에게는 손이 두개가 있어서 한 개씩 들고 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떡볶이 가게에 가면 떡볶이는 여전히 비닐이 덮인 접시 위에 담겨 졌고, 정육점에 가면 50원을 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왜 갑자기 나의 과자를 담는 비닐 봉지에만 가치가 부여됬는지 궁금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산을 타게 되었다. 우연히 만나 알고 지내게 된 T가 산을 좋아하는 맹인을 옆에서 보조해주는 모임에 초대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원래부터 한국의 산을 좋아하는 T는 서울 근교에 있는 산들을 구석구석 소개해주었고, 우리는 서울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누워 자외선을 흡수하거나 수박을 퍼먹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연의 품에 깊숙히 안긴 나는 여러가지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숲과 내가 얼마나 친밀하게 연결되어있는지 깨닫고 놀랐다. 감동적이었다. 자연이 숨쉬고 있고, 그것이 크고, 내가 그것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마음 깊숙히 느껴졌다. 나뭇잎이 바람과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과 목을 쓰담고 지나가는 바람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자연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자연의 작은 일부로서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자연"스러웠다. 나의 딸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같이 있는 시간인 것처럼, 산과 닿아 있는 시간 동안, 혹은 산을 생각하는 시간 동안, 나는 그것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연의 정체성은 "맞닿음"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뿌리와 흙의 맞닿음, 햇빛과 나뭇잎의 맞닿음, 벌과 꽃술의 맞닿음, 정자와 난자의 맞닿음, 아기와 유방의 맞닿음, 버섯과 시체의 맞닿음. 이 존재와 존재의 맞닿음이 자연의 신비가 숨쉬고 꿈틀거릴 수 있는 장(場)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이 플라스틱이라는 대단한 합성 물질을 만들어냈다. 이 인조품은 확실히 대단해서 물은 물론 공기도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생산비가 저렴하고 유연한(?) 플라스틱은 쉽게 찢어지지 않고 상품을 산소로부터 효율적으로 차단시켜주어 대량 생산과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세계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흘러들어가지 않았겠나 싶다. 자신의 폐기물을 잘 처리할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은 별 생각 없이 땅이나 바다 속으로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쑤셔 넣었고, 400년-500년 간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은 더럽고 질긴 손으로 자연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식품이나 생활 용품을 대량 생산하는 유통하는 글로벌 기업들에게 플라스틱은 듬직하고 유능한 동시에 값이 "저렴한"* 최고의 파트너이고, 거북이나 수달의 죽음을 이렇게 보는 것이 기쁘지는 않겠으나 그들이 매년 벌어들이는 몇 십억*을 포기하면서까지 고민할 말한 가치가 있는 문제는 아닌가보다. 플라스틱의 생산이 2015년 쯤에 3억 톤을 찍고 5억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의 일상 속의 노력이 그들의 기하학적인 생산과 무관심에 비교하여 너무나 먼지같고 의미없음이 깨달아지고 난 후에도 나의 지속가능성-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거북이에 목에 걸린 그물을 끊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고기들을 "플라스틱 수프"에서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플라스틱의 존재가 역겹기 때문이다. 생명성의 반의어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을 만큼, 플라스틱은 죽음보다도 차단하고 끊고 질식시키는 것을 더 훌륭하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뻔뻔스럽게 반짝이고 투명한 플라스틱이 제공하는 간편함과 깔끔함, 싱싱함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자연과 더 애틋해지고 싶은 나는 지금의 나를 위해서 플라스틱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있고, 그 효과가 유감스럽게도 지구까지는 흘러가지 못하지만, 나와 우리 가족, 공동체에 흐르는 생명성을 응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나 사이의 쓰레기를 줄일 수록 자연은 나를 관계의 더 깊숙한 곳으로 초대한다. 거실에 있는 씨앗에서 새싹이 부끄럽게 흙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힘을 부여하고, 자라나는 딸에게 차단과 일회성보다 연결과 지속성이 자연스럽고 좋은 것임을 가르쳐준다다. 지금의 공동체를 연결해주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 사랑을 한다. 함께 자연을 더 아끼고 쓰담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지속가능성: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환경과 생태계 또는 공공으로 이용하는 자원 따위를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적 또는 경제ㆍ사회적 특성. 인간 활동에 의하여 배출되는 오염 물질로 환경이 파괴되면 그 피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므로 항상 존재해 온 환경과 자원의 제약에 순응하여 재생산 능력의 범위 안에서 자원과 원료를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서로 협조하여야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생태계가 미래에도 유지될 수 있는 환경이란 의미로 [...] 인간과 자원의 공생, 개발과 보전의 조화,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의 형평 등을 추구한다. <한경사전>
*결코 저렴하지 않다.
*코카콜라의 2021년 수익은 40조 달러로 작년보다 13%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