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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dTiger Oct 05. 2022

취향이 수익이 된다는 말의 함정

크리에이터 플랫폼이 광고에선 절대 하지 않는 말

좋아한단 사실 자체가 가치가 되는 세상?

  취향을 수익으로 전환한다는 표현,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유튜브에는 자신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는 채널이 수십만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고, 최애 아이돌 사진만 잘 모아놔도 영향력 있는 트위터리안이 될 수 있다. 카카오뷰는 대놓고 취향 판매가 주된 콘텐츠인 플랫폼이다. 바야흐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경쟁력인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향력,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 곧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말과 동치인 것은 아니다. 카카오뷰는 어뷰징으로 인해 수익이 반토막 났다는 뉴스 기사가 뜨고 있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콘텐츠로 운영되는 SNS 채널은 기본적으로 수익 창출이 불가능하다(편법이 없지 않지만). ‘취향'과 ‘수익'이라는 키워드를 연결시키기 위해 인터넷 세상을 항해하다 보면 결국 그 취향을 새로운 창작물로 빚어낼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요구받거나 미술품 투자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향력 있고 경쟁력 있다는 말은 곧 누군가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는 언제나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재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카카오뷰같은 서비스도 시도되고, 각종 큐레이션 서비스들이 실제로 시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이 헤매는 이유는, 그 ‘가치'를 ‘돈'으로 환전하는 방법에 언제나 정답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거래해보려 시도된 밈 NFT가 (물론 아직 여전히 영향력 있는 거래를 보여준다고는 하나) 1년 만에 가치가 폭락했다는 소식이 더 흥미로운 게 현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취향을 어떻게 환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그것이 ‘가치’가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가치가 있다고 먼저 말해놓고 그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게 웃기지만 결국 환전 가능성의 성패는 '가치 있음'이다. 진짜 가치가 있다면 오히려 원하는 쪽에서 어떻게든 비용을 지불하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룰루'라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각종 크리에이터 플랫폼과 NFT의 황금빛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은 ‘그래, 네가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 있는 거야. 따라서 그 가치를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보다 호불호가 명확한 너는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므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자기들이 만든 네트워크에 참여해서 손해 봤던 과거를 조금이라도 수익으로 만회하라고 권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룰루'를 좋아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건 그저 사실로서 존재할 뿐, 타인의 삶에 있어 조금의 효용도 증가시켜 주지 못한다. 그 취향이 진짜 가치로 변하는 건, 그것이 유무형의 콘텐츠가 되어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순간이다.

진짜 좋아한다!

  예술과 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보는 예술과 일의 차이는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업을 하느냐이다. 디자인을 예로 들자면 디자이너의 작업에 센스는 필요할지언정 취향은 필요 없다. 디자이너는 철저히 타인의 취향을 위해 작업을 한다. 가끔 작업자의 취향이 고객의 취향과 일치해 즐겁게 업무를 할 기회가 생길지언정, 그 업무의 목적은 본인 취향 추구가 아니다. 끊임없이 타인의 만족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디자이너는 그래서 더욱 고된 감정 노동을 감내하게 된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르다. 예술가 작업의 목적은 철저하게 자기 취향 만족이다. 타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내려놓는 예술가도 있겠지만, 이미 그 순간 해당 행위는 예술이 아닌 상업적 활동이란 질타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에겐 배고픔이란 이미지가 뛰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 예술가의 취향이 대중의 취향과 일치한 순간 세상은 그 사람에게 부와 명예라는 보상을 내린다. 그 과실을 누릴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국 흔들리지 않고 더 나은 결과물로 작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취향이 필요하다.

  나는 ‘룰루'라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 사실은 어떠한 가치도 없다. 하지만 내가 ‘룰루'의 사진을 모아 주기적으로 SNS에 공유한다면, 누군가는 날 구독하고 꾸준히 나의 채널에 관심을 줄 것이다. 어쩌면 수천수만 명의 구독자가 생길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고양이 관련 비즈니스에서 나에게 광고를 줄 수도 있다. 내 취향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콘텐츠를 공유했을 때, 누군가에게 효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 즉, 내가 취향을 가진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취향은 충분조건이 아니라, 콘텐츠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난 비전 없이 생산력만 축내는, 나보다 더한 호구를 찾기 위해 스스로 호구가 돼야 하는 NFT 찍어내기 플랫폼에 미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과거와 달라진 건 없다. 기술이 사실 자체에 가치를 주진 않는다. NFT건 플랫폼이건 없던 가치를 돈으로 환전해줄 순 없다. 취향에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선 결국 예술을 해야 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예술을 하는 ‘방법', 그리고 거래될 수 있는 ‘콘텐츠'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유화를 배워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공예를 배워 크래프트를 하지 않더라도 우린 글로, 그림으로, 아카이브로, 큐레이션으로 취향을 담아낼 수 있다. 모두 거래 가능한 콘텐츠이고, 그 자체로 예술이다. 결국 우린 모두 내 취향이 타인에게 닿길 바라며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크리에이터 플랫폼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구와 일러스트,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플레이그라운드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취향의 수익화'라는 말은 참 달콤하다. 지금도 체리픽은 생산자가 될 수 있는 문턱을 낮추고, 많은 준비 없이도 수익화에 도전해 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하지만 체리픽 또한 가치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순 없다. 체리픽은 그저 쉽고 편하게 아날로그 예술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디지털 도구를 제공하고 싶을 뿐이다. 미술관이나 서점이 아니라도 자신과 취향이 맞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체리픽이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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