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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ure Oct 17. 2022

다소 안일해서 가능했던 서른 넘어 이민할 결심

대박도 쪽박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믿음으로 떠난 캐나다 이민


훌륭한 편인 회사원이었다.


사장님이 꼽은 우리 회사 최고의 직원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밥벌이를 함에 있어서 부끄러울 것은 없으려고 했다. 맡은 일은 다 해냈고, 상사들과 잘 지냈고, 후배들은 퇴사 후에도 연락을 이어갔다. 일이야 원래 다 내 맘 같지 않은 거고, 애매한 갑질도 성희롱도 가끔 당하고, 동료들과 술 마시고 같이 욕하고, 노래방에서 한풀이하면 또 살만해지고.


회사생활이 불행했냐고 물으면, 힘들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죠 뭐, 다들 힘들잖아요 헤헤, 넉살 좋게 눙치면서 넘어가는 그런 회사원이었다. 그러다가 4월 출근길, 점점 심해지는 미세먼지를 탄식하며 흐린 눈으로 하늘을 보다 문득 아득해졌다. 불행하진 않은 채로 그냥 쭉 살면 되는 건가?





배우자는 이민을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연애할 때부터 ‘내 사주에는 해외에서 사는 팔자가 있대’를 꾸준히 말했기 때문인가. 말로만 외국에서 살고 싶다고 나불대는 게 로또 당첨금 소비 계획을 세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지만 이것도 계속하니 효과가 있었나 보다. 어디부터 시작할지 모를 때에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시장에 발품을 팔아보자는 데에 동의한 우리는 이민 공사와 이민 박람회를 찾아다녔다.   



- 어학연수 안 가보셨고, 워홀도 안 가보셨어요?   



다섯 번째 이민 공사 상담을 받자 큰 가닥은 얼추 잡히는 듯했다. 이민자가 떠받치고 있는 나라답게 캐나다는 이민 정책이 다양하게 잘 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4년제 대학 학위가 있고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에게 가장 접근이 쉬운 것은 유학 후 이민이었다. 캐나다에서 학위를 취득하면 현지 취업이 가능한 워크퍼밋을 신청할 수 있고, 2년여의 학업과 취업 후 1년 정도의 경력을 더하면 큰 장애물 없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어서 많이들 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토종 한국인에게는 취업이 잘 되는 요리학과나 유아교육과를 권한다는 말이 공식처럼 따라붙었다. 어떻게 보면 입시학원과 비슷하구나. 높은 명문대 진학률이 학원의 실적이 되듯이 업체들은 영주권 취득이 수월한 방향으로 상담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열정에 불타 넓은 세계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지쳐있었다. 요리사요? 유치원 선생님이요? 지금 저는 새로운 직업을 개척해 나갈 기력이 없어요. 그리고 공부가 싫었다. 아 개발자 취업 잘 되는 거 알죠, 근데 제가 공부는 하기 싫은걸요. 내 기준에서 요리사, 유치원 선생님, 개발자는 너무 색이 뚜렷한 직업이었다.


저는 그냥 회사원인데요.


쉬운 길은 재미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누구보다도 재미없고 싶은 게 나였다. 그동안 했던 일과 비슷한 걸로, ‘늘 먹던 걸로 주세요’ 톤으로 말하며 날로 먹고 싶었던 건데 이민 공사들은 난색을 표했다.   



- 저는 (배워 봤던) 마케팅학과를 나와서 (비슷한) 관련 일을 하고 싶은데요.

- 저희가 한 번도 그쪽 학과로는 이민 진행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현지인들도 취업이 어려운데 외국인을 채용할까요, 어려우실 거예요…

- 한국에서 경력도 있고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되니까… 영어 잘하고 학교만 갓 졸업한 20대랑 비교해 보면… 어떻게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대단히 줏대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저 최대한 쉬운 길로 가고 싶다는 열망으로 학과와 진로를 정했다. 늘 나를 과대평가하는 하는 경향이 있는 배우자는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려는 것이 멋있다며 나를 한껏 치켜세웠고, 그래서 일단 속마음을 다 열어 보이지는 않은 채 그의 상찬을 즐겼다. 어쨌든 앞날은 알 수 없고 나의 결정은 안일했으니 그런 명분이라도 필요했다.



내가 그래도 PR회사에서 6년, 출판사에서 1년을 구른 한국 회사원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망하진 않겠지. 폭삭 망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런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 만큼 너 주인공 아니야.


불안감이 해무처럼 밀려올 때마다 그거 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곰방대를 휘둘러 휘휘 흩어버렸다. 아니 불안이 곰팡이처럼 피어오를 때마다 안 보이게 겹겹이 대충 도배만 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몇 시쯤 됐으려나, 주말 오후 낮잠에서 깨어나 약간 멍한 상태로 더듬더듬 몸과 정신의 싱크를 맞추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딱 그 기분인데 벌써 캐나다에 온 지 3년이 됐다.


그 사이에 혈혈단신으로 판데믹을 겪었고, 졸업을 했고, 취업을 했다.

아시아 여성, 이민자, 딩크족, 35살 사회초년생, 프로그래매틱 캠페인 매니저, 나를 소개할 키워드가 줄줄이 늘었다. 20대 땐 삼십 대 중반이 되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하찮은 사람이 된 대신 할 얘기는 다양해졌다.


물론 불안이 말끔히 사라지진 않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국의 친구들이 어느새 팀장급이 된 걸 보면 초조하다. 그러다가 또 풍경 좋은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져 버려서,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라고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뱉는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도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분명한 건 여기가 낙원이든 아니든 나한테는 잘 맞는다는 것. 그래서 누가 “캐나다 이민 갈까요, 말까요?”를 물으면 질문이 틀렸다고 폼 잡고 싶다는 것이다. 대단할 것 없는 나의 이야기로 누군가가 접힌 자기의 세계 한쪽을 펼쳐보고 싶어 진다면 기쁠 거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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