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재능충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이만하면 됐지 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성공의 비결에 대해 대답한다. "하루에 4시간 씩만 잤어요." "정말 여러 번 실패하고 다시 도전했어요." "oo법칙을 철저히 지켰어요." 인터뷰나 자기 계발서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숱하게 접한다. 그때마다 '후, 그래 좀 더 열심히 하자.'며 자책하고 반성했다. 조금 더 하면 나 역시 잘 될 거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살다 보니, 어느 정도 노력과 시간이 쌓이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성공한 사람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겠지. 큰 성공이란 쉽게 오는 게 아니니까. 남들 놀 때 일하고, 악착같이 노력했겠지. 근데 단지 그뿐일까? 나는 노력을 덜해서 이 꼴인가?



노력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한다. '와 노력하면 다 되는구나?' 또는 '와, 노력해도 이거밖에 안되는구나...?'. 누구나 간절히 이루고 싶은 게 있고, 다른 사람보다 잘했으면 하는 영역이 있다. 나도 그랬다. 노력을 해보기 전까진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한 번 해보자. 하면 되지. 패기 넘치게 링에 올라서면 타이슨이 했다는 불후의 명언과 마주하게 된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진." 흠씬 두들겨 맞고 뻗은 채 생각한다. 내가 노력을 덜한 건가 아니면 노력해도 애초에 안 되는 건가. 내게 노력이란 마치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벽 발견해 내는 일과 같았다. 아 내 앞길에 이런 벽이 있었었구나 하며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모든 축구 선수들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만 누구나 호날두처럼 많은 골을 넣을 순 없다. 일 손이 부르트도록 붓을 잡고 작품을 쏟아낸다고 누군가가 그의 그림을 수천만 원에 구매해주진 않는다. 모든 사업가가 성공을 위해 극단적 이리만치 몰두하지만 누구나 저커버그처럼 페이스북을 뚝딱 만들어 내진 못한다.



좀 더 눈을 낮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학창 시절에 수능을 잘 보기 위해 근 6년을 노력했다.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했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자주 만화책을 봤다. 어느 날, 그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물으러 갔고 그 친구는 아주 간단하게 원리를 설명해 줬다. 난 축약된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더 풀어서 설명해...?"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처참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저 놈보다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한 문제라도 더 보고 만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단 한 번도, 단 한 과목에서도 그 친구를 이겨보질 못했다. 수능 성적은 공부한 시간을 나래비 세워 주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다고 서울대에 들어간 게 아니다. 누구보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서울대에 입학하는 거였다. 노력한다고, 간절히 원한다고, 내가 해당 분야의 최상위권으로 올라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력의 차이 이전에 재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는 진즉 지났다.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그 수준도 천차만별이란 것도 이미 잘 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재능의 차이', 나의 '부족함'을 무시하기가 너무 어려워진 세상이 됐다는 거다. 세상은 강제적으로 내게 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SNS 때문이다. 다른 수준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너무 가깝게, 너무 자주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유튜브에서, 틱톡에서, 스레드에서 온 사방에서 재능충들이 등장한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어찌저찌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매일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고 분석해서 유망한 주식에 투자한다. '땅을 파면 돈이 나오나'. 예금 이자보다라도 더 나은 수익이 나면 감지덕지인 맘으로 힘을 쏟아붓는다. 알고리즘은 얄궂게도 그런 내게 투자 수익을 인증하는 고수들의 피드를 무수히 가져다 바친다. 그 어마어마한 성과 앞에서 내 계좌는 한 없이 초라해진다. 그들에 비하면 난 말 그대로 돈이 나오라고 맨 땅을 파는 느낌이다.


자괴감을 느끼는 게 어디 이뿐일까. 대자기관리의 시대다.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공부를 하며, 지친 몸을 다독여가며 헬스장을 다녔다. 마르고 왜소한 몸이 싫어 4~5년간 꾸준히 몸을 키웠다. 남들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 때, 난 덤벨을 들었다고 자부하며 건강과 자기 관리를 모두 챙긴 스스로를 칭찬했다. 지친 하루의 끝에 인스타를 킨다. 나보다 족히 10년도 더 어린 사람이 '1년' 만에 만든 몸이라며 포징을 취하고 있다. 그 몸에 비견하면 내 몸은 그저 약간 볼록한 거적때기다.


그래, 이게 바로 문제다. 예전에 날 위축되게 하고 내 노력을 비웃는 건, 공부를 지독하게도 잘하던 내 옆자리 재능충 친구 놈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난 온 세상의 재능충과 날 비교하게 되었다. '엄마친구 아들' 대신 전 세계 각지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내 비교 대상이자 잠재적 경쟁자가 된 거다.







어느새 SNS에 고만고만한 사람은 없다. 꾸준히 매일의 일상과 노력, 점진적 성장을 알리는 사람도 없다. SNS는 최고들이 최고의 순간을 자랑하는 전시장이 되었다. 비교가 안 좋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SNS에서의 모습을 모두 믿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온사방이 성공신화로 가득한 상황에서 눈 감고 귀 막는다고 마음까지 무덤덤해지지는 않는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내 성과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커진다. 내 성과를 확인하는 방법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상대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까.


예전엔 각 분야 상위 0.1%, 0.01%의 사람들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자서전을 찾아본다거나 각을 잡고 앉아 TV 인터뷰나 프로그램 등을 시청해야 했다. 한정된 지면과 시간으로 인해 많은 사례를 보지도 못했. 반면에 이젠 기존 매체는 물론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각종 숏폼을 통해서 매분매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의 '과시'를 접하고 있다. 외모, 예술적 재능, 부, 성공 등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매일 내 피드를 가득 채운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나 노력 중인 사람은 알고리즘의 간택에서 소외된다. 자연스레 기준은 한없이 엄격해지고, 준거 집단도 비현실적으로 높아진다. 성취감도 의욕도 자존감도 떨어진다. 기를 쓰고 노력해도 최상위 재능충을 따라가기란 요원하다. 상대적으로 난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 된다.




이런 재능충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은 세 가지의 방향으로 흘렀다. 첫째, 타고남에 대한 동경. 노력을 통해 높은 위치에 올라간 것이나 노력 그 자체에 대한 칭찬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다. 대신에 무언가를 '타고났다'는 그 자체가 동경과 칭찬의 대상이 된다. 노력해서 예뻐지고 잘생겨졌다는 것보다 어린 시절부터 완성된 이목구비였다는 사실에 열광한다. 자수성가로 돈을 벌었단 사실보다 금수저였단 사실이 부각된다. 어차피 노력으론 절대 그 영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타고남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거다. 과거의 귀족이 핏줄로 정해졌다면 현재의 귀족은 부나 외모,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재능충의 시대에서 두 번째 반응은 노력의 포기다. 노력하라는 소리는 이제 관심을 끌지 못한다. 오래, 장기적으로, 인내해야 얻을 수 있는 건 가치가 없다. 그렇게 노력해 봐야 원하는 걸 이뤄낸단 보장이 없다. 노력을 통한 성공 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자, 인고의 과정에 대한 체념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수많은 벽들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먼저 쉽게 이룬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다. 난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혼자 과거로 돌아가거나, '나 혼자만 레벨업'처럼 나만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싶다. 천천히 꾸준하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성장하는 주인공이 설 자리는 이제 없다. 오히려 그게 더 비현실적이다. 남과 다른 재능충이어야만 이 험한 세상에서 우뚝 설 수 있다는 거다.


마지막 반응은 바로 한탕주의다. 어려운 길은 싫다. 오래 걸리는 건 더 싫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좋다. 어차피 가진 게 별로 없었고, 더 크게 가지리란 보장이 없다. 결과는 빨리 나야만 한다. 자연히 좀 위험할지라도 하이 리턴을 원한다. 나스닥 지수나 배당주처럼 장기간 천천히 우상향 하는 자산은 투자 대상에 끼지도 못한다. 대신 3배 레버리지 ETF, 하락에 베팅하는 인버스 2배 상품 같은 것만 눈에 들어온다. 부동산은 '소울' 메이트다. 내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빚을 지며 투자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겨우 점프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면서 그저 밈일 뿐인 알트코인에 돈을 넣는다. 어차피 잃어도 벌어도 표 안나는 푼돈이라 몇 배씩 뛰지 않으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재능충의 시대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스스로를 지키려 발버둥 치던 나의 이야기다. 타고난 재능이랄 게 없었다. 특히나, 내가 가지고 싶던 것, 이루고 싶던 분야에선 늘 철저히 약자였다. 자본주의 시대가 원하는 능력에서 난 늘 한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이 내게 자주 박탈감과 열등감을 불러왔다. 무언가를 얻으려 노력할 때마다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머리를 비우고자 킨 SNS에선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다들 자신의 성공에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과 욕망이 커질수록 반대급부로 조급함과 자괴감이 커졌다.







어느 날 친한 사람들과 술을 한 잔 했다. 오래간만에 모였지만, 다들 변함없이 친근하고 편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쉴 새 없이 낄낄거렸다. 오래된 친구들, 어느 누구도 서로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사이들이었다. 누가 돈을 얼마나 벌었니, 너희 집은 얼마가 올랐니 따위의 말 대신 추억팔이와 서로에 대한 1차원적인 농담이 난무하는 자리였다. 그저 나로 있으며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펼쳐놓으면 되는 자리였다. 눅눅해진 마음을 널어 펼쳐놓고 서로 말려주는 그런 자리였달까.


얼큰한 취기가 피어오를 때 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는 길이었다. 배는 부르고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소소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다. '아, 더할 나위 없이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뭘 위해 스스로를 갉아가며 아등바등 사는 걸까 싶었다. 자기 계발, 좋다. 노력, 좋다. 성공, 더 좋다. 근데 뭘 위해서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의문이 든 거다. 내가 보는 곳이 어디길래, 남과 스스로를 비교해 가며 괴로워하는 건가 싶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불행하지 않은 게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커다란 부, 명예,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불편한 게 없고 아픈 게 없는 평온한 상태가 바로 행복한 상태라는 거다.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 친구들, 몸을 뉘일 수 있는 집, 그 정도의 쾌락들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는 거다. 엄청난 게 필요하지 않다는 거다. 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이 아닌 '텅 빈 욕망'이 큰 고통을 낳는다고 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선 이런 말이 나온다.


얼마 큼이어야 충분하지?
언제나 그 답은 "지금 가진 것보다 더"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더 많이"는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른다.
"난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봐요. 이런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해 줘요."

"충분히 좋다. 다른 말로, 완벽하다."


나는 왜 달려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경주마처럼 남들이 다 달리니까, 달려야 한다고 훈련받았으니 달려왔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복하기 위해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남과 비교하며 노력했던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당위성, 괜한 불안감, 목적 없는 성장에 대한 압박, 이런 것들이 그저 날 괴롭히고 있던 거구나 싶었다.


난 앞으로도 고만고만하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고만고만한 외모, 고만고만한 자산, 고만고만한 일을 하며 고만고만한 삶.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인가? 오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의 삶이 내게 알려준 명백한 진리가 있다. 행복은 성취의 나래비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경쟁도 비교 대상도 아니라는 것. 고만고만함을 두려워할게 아니라 비교를 고만해야 한단 거.

내게는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 내게 딱 맞고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내 삶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최'상'의 삶은 아닐지라도 최'적'의 삶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며, 지친 나의 하루를 다독인다.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따라서 모든 사람에겐 그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좋은 직장을 고르는 새로운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