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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모 Mar 23. 2024

[그림책Q] 가해자가 말하는 진실

중년을 위한 그림책 - ③ 존 셰스카『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아기돼지 삼 형제』 이야기는,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집을 지었던 아기돼지 두 마리가 못된 늑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늑대에게 잡아먹혔으며 벽돌집을 지은 첫째 돼지만 다행스럽게 살아남았고, 늑대는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비록 두 마리 어린 돼지들이 희생되었지만 결론적으로 욕심 많고 고약한 늑대의 죽음으로 인과응보의 교훈을 남기고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사실은 아직 아무도 진짜 이야기는 몰라. 왜냐하면 늑대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들은 적이 없거든."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의 첫 페이지가 아주 솔깃하다. 늑대가 전하는 아기돼지 삼 형제의 진짜 이야기(The true story)는, 돼지일보(the daily pig)에 실린 '커다랗고 고약한 늑대의 범죄'에 대한 늑대 자신의 반론인 셈이다. '아기돼지들을 늑대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는 건가? 그럼 누구지?'


==> 연이은 학폭 사건들로 어수선한 가운데, 유명 웹툰작가의 초등2학년 아들(A군)이 학교에서 여학생에게 한 잘못된 행동을 알게 된  B교사가 이를 학폭으로 간주하여 A군을 교실에서 분리조치시켰다. 이런 B교사의 조치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A군의 부모가 B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했고, B교사는 결국 직위해제되었다. A군의 행동이 가볍지 않은 것이었는데, 도대체 B교사가 어떤 잘못을 한 걸까?

 


"내가 우리 할머니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란다. 나는 아주 심한 감기가 걸려 있었지. 그때 마침 설탕이 다 떨어졌어."


사실, 늑대가 이웃인 아기돼지 집에 가야만 했던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늑대는 할머니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침 감기로 몸이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돼지일보에서 표현한 '커다랗고 고약한 늑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 사실,  A군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았다. A군은 일반학교에 다니면서 특수교사인 B교사의 특수학급에 참석하고 있었다. A군의 부모는 자폐아의 돌발행동은 흔한 것으로, 특수교사인 B교사의 대처가 심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A군은 이날 이후 평소보다 불안해했고 등교도 거부했다고 한다.



"지푸라기 더미 한복판에 첫 번째 아기 돼지가 있는 거야. 완전히 죽은 채로 말이야. 

... 짚더미 속에 먹음직스러운 햄이 있는데 그냥 가는 건 어리석은 일 같았어."

   

"... 두 번째 아기 돼지가 있더라고. 역시 완전히 죽은 채로 말이야. 음식을 바깥에 그냥 놔두면 상하고 만다는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그걸 먹어 치우는 것뿐이었어."


늑대는 케이크에 필요한 설탕을 얻으러 아기돼지 집에 갔었는데, 하필 그때 요란하게 재채기가 나왔다. 재채기 바람으로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지은 아기돼지들의 집들이 무너지고, 그 난리통에 아기돼지들도 죽게 되었다는 것이 늑대가 말하는 진실이다. 즉, 아기돼지들의 죽음은 늑대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 사고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찜찜한 부분은, 늑대가 죽은 아기돼지들을 '어쩔 수 없이'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  A군의 부모는 아들의 가방에 늘 녹음기를 넣어 등교시켰다. 사건 당일 이 녹음기에 A군을 나무라는 B교사의 짜증 섞인 말투와 다소 감정이 섞인 말들이 녹음되었다. A군의 부모는 녹음된 내용을 확인하고 B교사를 아동 학대로 신고하면서 증거로 제출했고, 이로 인해 특수학급 교사였던 B교사가 직위해제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발달장애 아동 특성상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특수학급에는 장애아동만 수업을 받기에 상황을 전달받을 방법이 없어 확인이 필요했다" A군 부모가 A군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두게 된 이유였다. 누군가를 고의로 감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고 부모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돼지같이 귀엽고 조그만 동물을 먹는 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원래 우리는 그런 동물을 먹게끔 되어 있거든."


늑대가 이미 죽어있는 아기돼지 두 마리를 먹은 것은, 그저 본능과 상식에 따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기돼지들을 죽였다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A군의 어머니는 B교사 후임으로 온 교사의 수업에도 교사 몰래 녹음기를 이용했다. 하지만 담임교사와 장애아동 활동 지원사에 의해 녹음기가 발견되었고 A군의 부모는 사과를 했다. "자폐아와 (교사가) 단둘이 있다는 부분에서 아이 엄마로서는 다시 두려움이 일었다" 두 번째 비밀 녹음기에 대한 A군 어머니의 해명이었다. 장애아동의 부모로서 피해의식에 갇혀서 아들 보호의 명문으로 비밀 녹음기 사용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 돼지는 머리가 좋지 않았어."  "... 나는 평소에는 꽤 침착하단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미치고 말지."


이상의 늑대 이야기로 유추하면 아마도 법정에 선 늑대는 마지막 변론으로, '아기돼지들은 머리가 나빠 어리석게도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집을 지었고 결국 집이 쉽게 무너지면서 돼지들이 죽게 되었으니 돼지들의 죽음은 자신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방문한 아기 돼지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말로 자신의 할머니를 비방했는데, 근본적으로 착하고 무고한 돼지들이 아니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  A군의 아버지 웹툰작가는 두 번째 녹음기 사건 이후 B교사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겠다고 태도를 선회하였지만, 다시 입장을 바꿔 유죄로 처별해 달라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였다. 입장을 바꾼 이유는, "특수교사에 유리한 편향된 언론 보도가 피해 아동의 잘못을 들추고 있다" "이로 인해 피해 아동의 부모가 마치 가해자로 전락해 일과 일상을 모두 잃게 됐다" "정서적 아동학대 사실이 명백하니 피고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해 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유명인인 A군의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 것이다. 사건의 본질이 학폭과 아동학대에서 벗어난 듯하다.




나는 누구의 편인가?

아기돼지? 늑대? A군의 부모?  B교사?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사건의 실체나 심지어 당사자들의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와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렸던 이유는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이 바뀌는 드라마틱한 반전(反轉)때문인데, 뭐니 뭐니 해도 구경꾼들에게 가장 짜릿한 것은 현실에서의 반전이다.


이런 반전 이야기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돈, 명예, 권력을 포함해서 힘이 될만한 것들을 가해자가 더 가졌다는 것이다. 더 가진 가해자들 때문에 학교폭력, 성폭력, 직장폭력으로 시작된 사건이 업무상 방해, 외압에 의한 XXX 등등으로 확대되면서 사건이 아주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싸움을 말릴 때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 해 보라고 했는데, 이제 역지사지는 오히려 피해자만 더 열받고, 더 미치게, 더 참을 수 없게 만들 뿐이다. 


'역지사지'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내로남불'이다.


완연한 능력주의 세상에서, 가진 자들과의 싸움에서는 가해자든 피해자든 내로남불이 정답이다. 그래서 다수가 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호해지고, 함부로 내 생각을 운운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이런 내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들에 대해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판단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비뚤어진 시각을 지닌 자를 너무도 쉽게 용인하게 될 것이다."


이건 안될 일이다!


그래서 늑대와 A군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자면, 


첫째, 비록 죽은 아기돼지들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나는 늑대의 편에 서고 싶다.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고, 이미 죽어있는 아기돼지를 먹은 것은 늑대의 '본능적 행동'이기에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A군 부모는 내 자식의 권리보호에는 엄격하고 타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모습이었다.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권리는 침해되어도 괜찮다는 비사회적 사고와 행동이 

이번 사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특수교사의 20년 경력이 무너졌고 특수학급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었다. 또한 공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망각한 채, 오히려 장애아동들과 그들의 부모에 대한 일그러진 편견을 키운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끝으로,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우리의 법과 제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발달장애아이기 때문에 '불법' 녹음이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발달장애아 어머님들~ 

앞으로 아이 학교 보내실 때 가방 안에 녹음기 하나씩 꼭 넣어서 보내 주세요!" 





< 볼거리 >

☞ 넥플렉스 드라마 '더 글로리' (2022, 2023)

     연출: 안길호

     극본: 김은숙

     출연:  송혜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外


☞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2022)

     감독: 김지훈

     원작: 하타사와 세이고 <親の顔が見たい>  

     출연: 설경구, 천우희, 오달수, 문소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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