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중,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달성한 한국 드라마라니, 보지 않을 수 없다. 묵혀뒀다가 몰아서 보았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는 면면이 화려하다만, 나는 그중에서 [미스터션샤인]을 가장 좋아한다. 서사도 훌륭했지만 이야기를 메우는 대사들이 무척 감칠났다. 그녀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죄다 언변이 유창하다. 사실 너무 유창하고 화려해서 지나칠 정도다. 예를 들어,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이 열연한 '김도진'이라는 인물은 간단한 말도 아주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그걸 누군가는 '대사의 쫄깃함'이라고도 했다. 각설하고, 현대 로맨스만 만들던 작가가 사극을 지어내 대박을 터트리더니 이제는 복수극이란다. 글 잘 쓰는거야 이미 유명하고, 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글로벌 1등을 먹었나 싶었다.
드라마를 3일에 걸쳐 단숨에 몰아보았다. 나의 감상을 요약하자면 '어른을 위한 잔혹 동화'다. 보통 동화의 작법이란,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더 글로리]는 그냥 시련이라기엔 사무치게 아플 학교 폭력이고 극복이라기엔 상대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심지어 죽음까지 유도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문동은은 앞으로 나아가 행복해질까. 글쎄, 잘 모르겠다. 금세 행복해질 사람이었으면 이런 복수까진 꿈꾸지 못할 것 같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포스터의 문구가 눈에 띈다. 문동은이 복수를 꿈꿨던 5명, 각 인물들의 포스터 문구는 다음과 같다.
박연진 : 그 모든 순간에 기뻐하던 너의 영혼
전재준 : 비릿하던 그 눈
이사라 : 조롱하고 망가뜨리던 그 손
최혜정 : 남의 불행에 크게 웃던 그 입
손명오 : 남의 고통에 앞장서던 그 발
Bold 처리를 한 단어들은 거의 스포에 가깝다. 문동은의 복수는 그들의 눈, 손, 입, 발, 그리고 영혼을 향한다. 나는 이 상징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그저 육체적인 고통뿐이랴. 차라리 비웃고 비릿하게 쳐다보고 조롱하고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것, 그래서 내 영혼에 쓰라린 각인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혹독하다.
문동은은 복수를 실행하기까지 '우연은 한 줄도 없었'다고 했지만, 진짜 그랬다면 복수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강현남을 만나지 못했다면, 재력과 능력을 갖춘 주여정의 조력과 협조가 없었다면 복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조력자들(주여정, 강현남 등)의 도움은 마치 활극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주여정'이라는 존재는 솔직히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누구나 들어도 알 '주병원' 정도의 아들이 '망나니'가 되어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복수라니, 흡사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름없다.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성공하지 못하는 사이 박연진은 다시 한번 그녀를 끔찍이 찍어 눌렀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선 모두가 딱 저지른 만큼(인과)의 최후를 맞이(응보)한다. 그래서 여운은 따로 남기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의 묘미가 여운과 되새김질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 딱 떨어져 외려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를 논할 때 [브레이킹 배드]를 떠올린다. 내게 이 드라마의 시작은 무척 지루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닌, 보통 인간의 감정에 기반한 행동들이 하나씩 새로운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는 점점 고조된다. 주인공 월터 화이트가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너무나 설득력 있다. 자존심, 경쟁심, 오기, 질투와 같은 흔한 감정들이 월터를 점점 나락으로 빠뜨린다. 마치 종이가 물에 젖듯 점점 변해가는 월터의 모습이 정말 실감 났다. '실감'이라는 감상은 보는 이가 이미 알고 있거나 지니고 있어서, '어! 나 저 마음 알아!'라고 느낄 때 생긴다. 그런 기시감 혹은 실감 속에서 악인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겠지만, 마음 한 자락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글로리 악인 5명의 마음은 입체적이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괴롭힘을 즐기는 그들의 마음 어느 한 부분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이 지글지글 타며 절규하는 사람 앞에서 웃을 수 있다니. 그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짐승에 가깝다. 그런 인간이 제 꺼에 집착하고 제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문동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그 고통이 너무나 실감 났다면 드라마 감상이 더 힘들었을 테니.
나의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이야기의 호흡은 가파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했다. 16부작, 그 긴 시간 속에서 잘 짜여진 기승전결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김은숙, 역시 명불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