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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Oct 05. 2022

정전 협상을 파탄 위기로 몰고 가며 쟁취해낸 한미동맹

동맹을 원치 않던 미국과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

[우수미의 한미 프리즘으로 365 시사 읽기: 10/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동맹의 핵심이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미동맹의 강력한 대북 억지력이 한국의 평화와 안정과 번영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조약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한국의 군사적 종속과 대미의존도가 강화되고, 현재까지도 한미 관계의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그렇다면 굴욕적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이 맞았을까?


▲ 한국의 동맹 제의를 거절한 미국


미국은 한국을 3번 배신했다. 첫째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일강제병합을 묵인한 것, 둘째는 1945년 소련과 일방적으로 38선을 획정한 것, 셋째는 1949.6월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하고 1950.1월 애치슨선언으로 한국을 미국의 아태지역 군사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 그런데 미국의 입장도 배신이었을까? 강대국의 힘과 영향력에 편승하기 위해 열렬한 사랑을 보낸 우리에게나 배신이지, 자원도 없고 정세도 불안한 조그마한 동북아의 한 약소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은 전략적 가치 낮음이었다.


미국은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미온적이었다. 한국 정부가 1948.8월 정부 수립과 1949.6월 주한미군 철수 이후에 미국 트루먼 행정부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이나 공개적 방위 공약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본 중심의 공산주의 견제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미국은 한국과의 조약 체결 대신 유엔 참전국 명의의 제재 선언과 국군 사단 증강 정도의 단순한 병력 지원 및 군사원조로 무마하려 했다. 전쟁의 화마로 철저히 파괴돼 공산 세력과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 위기에 놓인 한국에게 미국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유일한 국가였지만, 미국은 한국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평화적 조기 종전을 공약하며 출범(’53.1.20)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신속한 정전협정 체결을 목표로 스탈린이 사망(’53.3.5)한 소련과 협상을 재개했다. 한국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돼 또 다른 전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게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확실한 안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휴전은 전쟁 재발을 의미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면서 미국에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반도에 잔류하고 있던 중공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휴전 성립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없고, 중공군 철수는 정치회담에서 논의될 것이라며 한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


소극적인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이승만이 꺼내든 승부수가 ▴반공포로석방과 ▴한국군의 유엔군 탈퇴 후 단독 북진 감행 카드다. 강대국 미국을 압박할 적절한 수단이 없었던 이승만 정부는 조기 종전을 원하는 미국의 조급한 심정을 이용해 공산 진영이 강제 송환을 요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할 것과 중공군 잔류시 한국군 독자적으로 북진을 감행할 것이라고 미국을 위협했다. 반공포로석방은 휴전 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정전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고, 단독 북진은 정전협정 파기는 물론이고 주한미군의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미국은 한국을 설득하는 한편, 한국의 독자적 행동에 대비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시킬 에버레디 작전(Plan Eveready)까지 세웠다.


중공군도 한국의 의지를 꺽기 위해 중부전선에서 대공세를 시작(’53.6.10)했다. 6월 한 달 동안 유엔군 사상자가 2만명(사망4,861명, 부상1만6천명, 실종2천300명)이 넘었고 그 대부분이 한국군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인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지금 양보하면 장차 수백만 명이 희생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전협정 체결이 예정되어 있던 6.18일 새벽, 이승만은 한국을 무시하고 진전되고 있던 휴전 협상에 충격을 주기 위해 미국과 상의 없이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미 간 신뢰가 바닥을 치게 만든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철수가 공산주의의 승리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리더 미국이 결코 한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한국의 위협이 단순한 블러핑(bluffing)이 아니고, 한국의 협조 없이 체결된 정전협정은 실효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결국 조기 종전을 원하던 미국은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전쟁(Little War)으로 불릴 만큼 치열했던 2주간의 협상 끝에 한국은 중공군 철수 주장 철회와 휴전 협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미국과 ▴정전협정 이후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신속한 조약 비준 ▴장기경제원조와 1회 2억 달러의 원조 공여 ▴한국군 20개 사단과 해·공군력 증강 등에 합의(’53.7.12)했다. 그 직후 유엔군·북한군·중공군은 2년이 넘는 기록적인 협상 끝에 마침내 정전협정에 서명(7.27)했고, 분단 반대와 북진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는 서명에 불참했다. 상호방위조약은 가조인(8.8)을 거쳐, 10.1일 공식 조인됐다.


▲ 동맹 정치의 볼모로 전락한 비준서 교환과 유엔군에 이양된 작전통제권


상호방위조약 효력 발생의 마지막 단계는 비준서 교환이었다. 한미 의회는 각각 1954년 1.15일과 1.26일 비준을 마쳤다. 그러나 비준서 교환은 정치, 경제, 군사, 통일 문제 등을 둘러싼 양국의 이견으로 연기됐다. 북진과 반일의 기치 아래 안보 차원에서의 예방전쟁을 주장하는 이승만 정부와 일본을 동아시아 공산주의 봉쇄의 중심축으로 냉전 전략을 펼치며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자유 진영 내부를 단속하려 했던 미국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개최된 제네바 회담(’54.4.26-6.15)에서 이승만 정부가 독자적 북진 카드로 미국을 위협하며 상호방위조약 개정을 요구하자, 미국은 신뢰할 수 없게 된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비준을 연기한다며 맞대응했다.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서 친미 성향의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한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이 무산되고, 인도차이나 문제 악화와 오키나와 기지 사용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군사기지로서의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고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한국을 군사동맹국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제네바 회담 이후 성사된 한미정상회담(’54.7.27-30)에서 미국은 합의의사록의 형태로 ▴북진 포기 ▴작전통제권 ▴한일관계 개선 ▴대일 물품 구매 ▴환율의 현실적 조정 등의 일괄적 수용을 요구하며 한국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했다. 이승만 정부가 거부하자, 미국은 대한 원조를 전면 중단했다. 환율 문제로 이승만 정부가 유엔군의 현지 경비 선지급을 중단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유류 공급을 중단해 한국경제를 마비시켰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한국의 발전과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합의의사록에 서명(’54.11.17)했다. 한국은 7억 달러의 군사·경제 원조와 한국군 증강을 조건으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에 이양했고, 볼모로 잡혀 있던 비준서가 상호교환되면서 비로소 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비준서 교환 과정에서 나타난 한미갈등은 국제정치에서 국익을 둘러싼 투쟁이 적대적 관계뿐만 아니라 동맹국끼리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 약소국 한국의 외교적 승리


한미동맹은 국가 존립의 위기에 놓인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미국의 안보에 편승하기 위해 자율성을 일정 부분 양보하고 얻어낸 비대칭 관계에서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조약의 불평등성과 한국군의 자주성 문제로 미국과 심각한 불화를 빚었지만, 국가적 생존을 위한 미국의 방위 공약이 최우선이 돼야 하는 상황에서 주권과 자존심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조약의 비대칭성에도 불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배제되었던 한국을 포함케 하는 전환적 사건이었다. 한국은 지난 70여 년간 굳건한 한미동맹 하에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했다. 이런 점에서 상호방위조약은 조약을 원치 않던 강대국 미국을 압박해 약소국 한국이 얻어낸 값진 외교적 승리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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