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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우 Oct 08. 2022

엄마를 부탁해

여덟 남매를 기르시며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서럽도록 보고 싶다

9월 어느 날 친구 J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많이 감동했다며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에게 책을 사서 선물로 보내노니 꼭 읽어보란다. 소포로 배달된 책을 받고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며 단숨에 읽어 갔다. 우리 시대의 '힘들게 살다 가신 전형적인 엄마의 상'이 절절이 묘사되어 있어서 시골에서 자라난 나에게는 너무나 가슴 깊이 이해가 되고 또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내용들이었다.


    이 소설은 시골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가 당신의 생일잔치를 위해 엄마와 함께 서울에 사는 아들 집을 찾아가다가 서울역 지하철에서 몸이 불편한 엄마를 배려하지 않고 혼자 타면서 엄마를 잃어버리게 되고, 길을 잃은 엄마는 암으로 인해 서서히 잃어가는 기억들을 더듬으며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 전지적 시점에서 쓴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큰딸을 ‘너’로 칭하고,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 나서는 큰아들 형철을 ‘그’로 묘사하고 있다.

    어버이날에 4남매 자식들 누구로부터도 연락이 없을 때 자식들을 원망하기보다는 남들이 자식들을 욕하는 것이 싫어서 읍내 문구점에 나가서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리본 달린 카네이션을 스스로 사서 가슴에 다는 내용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끝없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소설가인 딸이 쓴 책을 읽고 싶어도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을 밝히면 자식에게 누가 될까 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딸이 쓴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이다.

    늘 자기 마음대로 집을 나갔다가 마음이 내키면 돌아오곤 했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아내가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엄마를 잃은 후에야 지난날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양친이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일을 당신 마음대로 하셨고, 어머니는 늘 엄하신 아버지를 무서워하시면서 아들 딸 뒷바라지를 하시며 한평생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머리에는 줄곧 나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시골 촌놈인 나와 동생이 고등학교 때 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어머니가 오셔서 뒷바라지를 하시곤 했다. 봉래동 산기슭에 살면서 반찬값이라도 벌어야겠다며 상대동까지 10리가 넘는 길을 겨울에도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매일 폐지 분류 작업을 하러 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얼음판에 넘어져서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러 다니시던 어머니. 그때 팔을 쓰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긴 머리카락을 매일 아침 내가 대신 빗어드리고 비녀를 꽂아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어머니는 나를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나의 어머니도 이 책에서의 엄마처럼 학교를 다니시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하신 분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셨고 베푸는 삶을 사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남에게 덕을 쌓으면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음으로라도 그 보답이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49제 때 제문을 썼었는데 나는 어머니를 ‘살아있는 부처님’이셨다고 표현을 했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셨지만 마음만은 위대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어떤 행동을 할 때 어머님이 살아생전 하신 말씀들을 떠올리며 조심한다.

    학창 시절 배웠던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풍수지탄이 생각난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이 뜻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아버지보다 한 살 아래로 1925년 생이신 어머니는 해방이 되던 해에 나보다 열다섯 살 위의 큰 형님을 낳으신 다음 줄줄이 다섯의 딸과 나, 그리고 남동생을 낳으셨다. 자녀에 손자와 증손자까지 대략 백 명이 넘는 자손을 두셨으니 애국자이기도 하시다.

    엄하신 아버지를 만나서 하고 싶은 것 제대로 못해보시고, 한평생 여덟 자식에다 손자들까지 기르시며 한 몸 바치시다가 자식들이 자리를 잡으려고 할 즈음에 너무 빨리 돌아가버리신 어머니가 오늘따라 서럽도록 보고 싶다.

어머니의 헌신이 자양분이 되어 나는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고, 동생은 내로라할 만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우리 팔 남매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두터운 우애로 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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