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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우 Oct 09. 2022

시골 풍경

맥주잔을 선물 받자 집사람과 제수씨가 좋아한다

명절이 예전 같지가 않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객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로 동네가 시끌벅적한데 몇 년 전부터 그런 분위기기 많이 옅어진 것 같다. 사람들의 명절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시골에는 고향을 지키는 젊은이는 별로 없고, 노인들도 한 해가 멀다 하고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내 고향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15년이 넘었고, 2년 전에 형님마저 갑자기 돌아가셔서 졸지에 형수님 외에는 내가 최고 연장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의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이지만 동생도 든든하고, 마흔이 넘은 조카들도 착하고 훌륭하기에 큰 다행이다.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동생과 조카들 가족을 포함해서 모든 구성원들이 고향으로 집합하기에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추석 전날 집사람과 딸, 그리고 아들이 오랜만에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며 고향으로 갔다. 차 안은 제한된 공간이라 불편하기는 하지만 대학생인 아들놈이 깔깔거리고, 큰딸이 분위기를 맞추어 줘서 무뚝뚝한 나를 불편하지 않게 했다.   


고향 마을에 들어가니 도로에 귀성객들의 차가 예전만큼 많이 보이지 않는다. 동네 중간을 통과하는 길가의 돌담을 보니 고향에 대한 정감이 물씬 묻어난다.


집에 가니 벌써 조카들과 동생네 가족이 모두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모두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질부들이 지짐이와 소갈비를 굽고, 장조카는 밖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미리 구워놓은 바비큐 등으로 와인파티 준비를 한다.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장조카는 모 유통회사의 구매담당을 오래 했던 터라 와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평소 장조카가 와인에 대해 전문가다운 설명을 하면 가족들 모두들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하지만 와인은 원체 종류가 다양하고 맛의 구별이 어려워  한쪽 귀로 들으면 다른 쪽 귀로 흘러 나가 버린다.

석양이 질 무렵 파티가 시작되었다.


추석 전날 밤의 풍경

   "우리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장조카가 준비한 와인으로 모두 함께 건배를 하고,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모두들 기분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낮에는 날씨가 더웠지만 해가 진 산골의 날씨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와인 몇 병이 동이 나자 냉장고에 보관된 '칭다오 맥주'가 끝없이 제공된다. 둘째 조카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부산에 본사가 있고 중국 상해에 지사를 두고 있어 중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많다. 평소 얼굴이 까무 짭짭해서 중국 사람들도 자기들 동포로 생각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내곤 한다.

이번 추석에는 조카 둘 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파마머리를 하고 와서 마치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 같다고 놀려도 싱글벙글이다.   테이블의 맥주가 떨어지면 "지현아 맥주~" 하면 싹싹한 아들놈이 자동으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온다.


"맥주는 크게 라거와 에일로 구분됩니다. 라거는 맥주 통의 아래 부분에서 발효가 되고, 마시면 쭉쭉 넘어갑니다.  에일맥주는 윗부분에서 발효를 시키는데 주로 향을 즐기는 것입니다. "

장조카의 맥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라거 맥주와 에일맥주, 그리고 흑맥주의 제조방법과 맛의 차이 등에 대한 설명이 한참 있더니 미리 준비한 고급 ‘스피겔라우 맥주잔 세트’를 집사람과 제수씨에게 선물이라며 건네준다. 맥주잔을 선물 받자 집사람과 제수씨가 좋아하며 인증샷 포즈를 취한다. 스피겔라우 맥주잔은 마실 때마다 사라지는 만큼의 거품을 새로 만드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조카의 갸륵한 성의에 감동하며 즐거워한다.


산골의 날씨는 역시 다르다. 밤이 늦어지니 갑자기 한기가 돌자 한 사람씩 소리 없이 방에 들어가서는 긴팔 옷을 찾아 입고 나와 어느새 모두 긴팔로 바뀐다.


약간의 취기가 돌자 고상한 노래보다 7080 이전의 노래가 구미에 당긴다.

"야! 너희들 노래 수준 좀 높여라~."  얼큰하게 취기가 돈 내가 객기를 부린다.

 다들 어떤 수준 높은 노래를 선곡하는지 조용히 기다리는데 내가 휴대폰의 멜론에서 뽕짝 음악을 틀었다. 그랬더니 집사람과 제수씨가 야유를 보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평소 뽕짝 음악의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어깨가 자꾸 움직인다.

나는 영락없는 동이족인가 보다. '우리 동이 민족은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얼마나 배웠던가.


어른들이 즐거워하니 애들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 5촌들끼리 신이 나서 시끄럽게 얘기를 나눈다.

몇 시인지는 몰라도 추석 전야도 정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이 밝아오자 부스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차례 준비를 한다.

제사를 지내는데 뭔가 순서가 잘못된 느낌이다.

"처음에 세잔을 하고 제주가 먼저 혼자서 절을 하는 것 아니야?"

"그런 것 같네요 ㅎㅎ"

장조카가 씩 웃으며 쑥스러워한다.

큰 형님이 돌아가시고 장조카가 제주가 되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마다 순서가 다르고 빼먹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밥그릇과 국그릇 위치가 바뀐 것 아니에요?" 제사를 지내는 도중 동생이 한마디 던진다.

 "아닌데, 예전에 형님께서는 분명히 밥그릇은 왼쪽에 국그릇은 오른쪽에 두시던데." 내가 대답했다.

 

국그릇의 위치가 바뀌었느니 아니라느니 서로 설왕설래하다가 동생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찾더니 반대가 맞단다. 제사 법도는 집집마다 다른 것인데 돌아가신 형님께 물어볼 수도 없고 동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가끔 제사를 지내다 보니 매번 제사가 새롭고 서툴게 느껴진다. 새삼 돌아가신 형님이 그리워진다.


조상의 산소를 찾은 자손들

제사를 지낸 후 제삿밥을 먹고 부모님과 형님 산소로 성묘를 나선다. 형제, 조카들 가족들이 함께 길을 나서니 큰 부대의 행군 같은 기분이다. 성묘를 한 후  산소 옆에 있는 밤나무 산에서 밤을 줍기로 했다. 평소 형수님께 일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해도 알았다고 해놓고는 그게 안 된다. 하기야 시골에 살면 죽지 않은 다음에야 일을 보고 그냥 있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형수님은 지난해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깨어나서 거의 정상을 되찾고 있다.


장갑을 끼고 밤을 줍는데 밤 가시가 장갑을 뚫고 손가락을 찌른다. 그래도 옛날 실력을 발휘해서 열심히 밤나무 아래를 기어 다니면서 밤을 주었다.

“뚝~, 뚝~”

여기저기서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에 혹시 머리 위로 떨어질까 겁이 난다.


잠시 후 "앗~" 하는 작은 조카의 비명소리가 저쪽에서 들린다. 밤송이에 머리를 찔렸단다. 밤송이는 예리하고 약간의 독성이 있어서 찔리면 오랫동안 따갑고 아프다.

서너 시간 밤을 줍는데 허리도 약간 아프고 목이 말라온다.

일에 꾀가 난 장조카가 엄마에게 얘기한다.

"목 말라죽겠는데 이제 그만합시다."

그러자 둘째 조카도 한마디 거든다.

"고급 인력들이 이런 일을 하면 수지가 안 맞는데, 차라리 밤 값을 드릴 테니 그만합시다."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엄마를 생각하면 일을 끝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들이다.


산이 비탈져서  알밤 포대를 옮기려면 지게로 져서 날라야 한다. 젊은 조카가 짐을 지겠다고 했지만 오랜만에 지게를 보니 내가 한번 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지게 가득 알밤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는데 호흡이 가빴지만 옛 추억에 젖어 즐거운 마음이 더 컸다.

소죽을 끓이던 우리집 아궁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 집은 아궁이로 난방을 했다. 그래서 겨울 방학이면 형님 형수님과 지게를 지고 황매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었다.

"부산 작은 아버지는 지게를 잘 지셨잖아요." 둘째 조카가 역시 선수를 알아본다.


오후 늦게 부산으로 돌아오기 위해 작별을 하는데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형수님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부산으로 돌아간다니 형수님은 이것저것 하나라도 더 싸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른다. 이것도 가가라, 저것도 가져가라 야단이다.


형수님은 신문지로 소중하게 감싼 참기름 한 병과 볶은 참깨 한 봉지를 가져와서 집사람에게 건넨다.

"형님 잘 먹을게요!" 집사람이 황송해하며 받아 든다.

우리 형수님은 당신의 아들 못지않게 시동생들을 좋아한다. 시동생이 아니라 부모 자식 간과 진배없다. 그래서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고향의  햇살 아래 바람을 가르며 차는 부산을 향했다.

“우리가 떠날 때 문간에 혼자 멍하게 앉아 계시는 형님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 눈에서 습기가 느껴진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왜 그렇게도 슬픈지 나는 엄청 많이 울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그만큼 많이 울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그 당시 친척 중 어느 분이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하늘이 보이는데 형제가 죽으면 하늘이 안 보인다고 했다"는 말을 했다. 큰 병을 앓은 것도 아니고 큰 몸살로 병원에 갔다가 2주 만에 형님이 돌아가시니까 그 슬픔이 감당이 잘 안 되었다.

부모는 정신적으로 나보다 한세대 앞이기에 언젠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하지만, 형제가 죽으면 자신의 옆구리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길은 언제 가도 정겹고 따스하다. 고향에 가면 내 마음은 어린 시절 그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는 귀천이 없고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고향은 나에게 언제나 어머니 품 안이요 나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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