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가득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가는 길은 꿈같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아마 야간열차였던 것 같다. 모두 기차에서 곯아떨어졌고, 눈을 뜨니 창밖이 환했다. 창문을 내다보니 우리는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어떤 동화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었다. 정말 그런 기찻길이 있는지 아니면 잠결에 잘못 본 것일지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에 도착했다. 잠이 덜 깬 채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고, 조그만 역사를 빠져나가 베네치아의 한복판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 같이 탄성을 터뜨렸다. 바다 위에 세워진 다리와 건물들, 그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 윤슬이 바닷물 위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괜히 물의 도시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우중충하고 으슬으슬 추운 독일과 체코,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을 돌다 이탈리아에 오자 중부 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남유럽이 얼마나 다른지 피부로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런던을 제외하면 모두 한 국가의 다른 도시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베네치아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가디건에 재킷을 껴 입던 복장에서 갑자기 민소매 티셔츠로 옷이 바뀌었다. 선글라스도 껴야 했다.
베네치아는 미로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바다 위에 세운 작은 도시여서 배와 도보 외에는 교통수단이랄 것이 없었고(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있기는 했던 것 같다), 삼륜 이상의 차가 없었다. 그러니까 대로 또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길이 조그만 골목길이었는데 그 골목길의 생긴 모양이 전부 똑같았다. 나는 방향감각도 있고 길을 그럭저럭 잘 찾는 편인데 베네치아에서는 도무지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요즘이라면 내 위치를 표시해주는 스마트폰이 있으니 조금 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베네치아에서는 지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시 한인민박에 묵었었는데 여행 호스트 노릇까지 해 주셨던 친절한 사장님 덕분에 그나마 길을 약간 익힐 수 있었다. 젊고 차분한 여자 사장님은 베네치아에 놀러 왔다가 이 도시에 반해 그대로 눌러 앉으셨다고 했다. 저녁 시간 베네치아 시내를 걸으며 투어도 해 주셨다.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나폴레옹군이 쏘았다는 포탄이 박힌 건물이다.
산 마르코 광장의 카페 플로리안에 갔다. 카사노바, 바이런, 디킨스 등 유명인들이 많이 찾았다는 300년 된 카페였다. 옛날에 죽은 문인들을 좋아하는 나는 이곳과 파리의 레 되 마고에 꼭 가 보고 싶었다. 되 마고는 못 가보았지만 플로리안이라도 가서 행복했다. 아주 비쌌지만 서버가 그 어느 유럽의 가게보다 친절해서, 딴에는 큰맘을 먹고 팁을 많이 남겼던 기억이 난다. 카페에서 딱히 문학적인 분위기라든지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 아우라는 느끼지 못했다. 화려하지만 낡은, 오래된 곳이었다.
근처의 조그만 섬인 무라노와 부라노 섬도 방문했다. 장인들이 유리공예를 하는 모습, 색색의 알록달록한 주택들이 기억난다. 얼룩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무라노였는지 부라노였는지, 두 섬 중 어딘가에서 파스타를 점심으로 먹었는데 파스타 맛은 잊었고 식전빵이 맛있었다. 빵에도 요금이 따로 붙어 충격을 받았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베네치아 카니발 때 쓰는 가면 기념품을 하나 사 왔다. 석고로 된 것이라 깨지지 않도록 남은 여행 내내 노심초사하며 짐을 쌌었다. 다행히도 온전히 살아남아 줘서, 본가의 내 방에 몇 년이고 걸려 있었는데 독립하면서 그대로 두고 왔다. 지금 내 원룸의 인테리어와 결이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버리기도 아까워서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해야지.
다시 베네치아에 가게 된다면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시기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