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쌤은 쉬는 날 뭐 하세요?”
지훈이 맥주잔을 내밀었다. 정윤도 어색하게 유리잔을 들어 상대의 잔에 갖다 대었다. 둔탁하게 유리 부딪는 소리가 손등으로 떨어졌다.
“아…거의 집에만 있어요. 그림 그리고요.”
“진짜요? 집에서? 정윤 쌤 그림 진짜 좋아하시는구나. 전 아무래도 이쪽 일 계속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미대 나오긴 했지만.”
정윤은 할 말이 없어 그러시구나, 하고 얼버무리며 맥주만 홀짝였다. 지훈은 봐둔 데가 있다며 피자와 맥주를 파는 곳으로 안내했다. 맥주도 피자도 맛있었지만 정윤은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여력이 없었다.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이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윤정이 떠올랐다. 가슴이 갑갑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마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리던 중 반대편 테이블의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녀 여럿이 섞여 앉은 시끌벅적한 테이블이었다. 아까부터 왁자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날아와 정윤의 머리카락까지 흔들어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어딘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생각하는 순간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하는 입모양을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윤정의 남자친구였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온갖 물감이 섞인 붓으로 휘저은 물통처럼 혼탁해졌고, 물을 너무 묻힌 종이처럼 우그러들었다. 저 사람이 윤정에게 이걸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나 오늘 정윤 누나 데이트하는 거 봤다, 아니 진짜 데이트라니까, 남자랑 단둘이 술 마시던데.
분명 말할 거야. 이야기를 안 할 리가 없지. 그러면 윤정은…윤정은……. 정윤은 그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뇌가 검은 물감 속에 잠겨버린 것 같았다.
“정윤 쌤? 왜 그래요? 뭐 있어요?”
마주 앉은 지훈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윤은 자신이 맥주잔을 꽉 쥔 채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훈은 궁금했는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윤정의 남자친구는 반갑다는 듯이 손까지 흔들었다. 순간 정윤은 그의 목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 저, 아는 사람이 있어서…잠깐만요.”
정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면서 식기를 뿌리치듯이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훈이 탐탁지 않은 어조로 아는 남자예요? 묻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으나 무시했다. 윤정의 남자친구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자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일어났다.
“어, 누나! 정윤 누나, 맞죠? 우리 그때 봤잖아요. 저 기억력 좋죠? 야, 다들 인사해. 내 여자친구랑 친한 누님.”
성우는(그제야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테이블에 앉은 이들에게 정윤을 소개했다. 다들 밝고 목소리가 크고 예쁘고 멋진 사람들뿐이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도 모두 신나게 웃으며 요란스레 인사를 던졌다. 정윤은 괜스레 반감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한테 갑자기 왜 소개하고 난리지? 이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나랑 친구할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유별나게들 구는 거야? 그는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한 뒤 성우에게 말했다.
“저기,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밖에서?”
성우는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별 말 없이 그녀를 따라 나왔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 찬 공기가 몸을 감쌌다. 가을이 오고 있구나. 정윤은 귓등을 간질이는 가을 소리를 느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누나 담배 펴요?”
“아니요.”
피웠었지만 끊었다. 돈이 없어서. 커피 값도 아껴야 하는 정윤에게 흡연은 사치스런 취향이었다.
“저도 안 피는데. 군대 가면 배운다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배우기 싫은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는 게 꼭 고등학생 같았다. 윤정도 그렇지만 이십대 초반은 다들 어쩌면 이렇게 아기 같은지. 자신과는 고작 몇 년 차이인데 말이다.
“같이 온 사람, 남자친구예요?”
“아니에요!”
정윤은 저도 모르게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성우가 씩 웃었다.
“그럼 썸? 반응 보니까 남자분이 만나자고 했나 봐요.”
“저, 그 얘기 윤정이한테 안 하시면 안 될까요?”
“뭘요? 누나 데이트하는 거요?”
“데이트도 아니에요.”
“저분은 데이트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분 사정이고요.”
그는 다소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이상하게 들릴 만도 하지. 정윤은 초조한 마음에 손까지 휘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 윤정이한테 만나는 거 이야기를 안 했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건너 들으면 서운해 할까봐…좀 부탁 드려요.”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까 왠지 더 말하고 싶어지는데요?”
“아, 제발요. 그러지 마세요. 네?”
정윤은 자신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성우도 정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잘생긴 남자와 이렇게나 오래 눈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마주한 것 자체가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는데 저쪽 골목에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치즈색 줄무늬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우아하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꼿꼿이 세운 꼬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 윤정이랑 완전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그렇게까진 안 닮은 것 같네요.”
“제가 윤정이랑 닮았다고요?”
“자매라고 해도 믿을 걸요. 분위기는 좀 다른데.”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어쨌든 그는 지금 윤정의 얼굴을 갖고 있었으니. 하지만 윤정이 가진 내 얼굴은 그럴 리가 없는데. 얼굴이 바뀌면서 뭔가 작용한 걸까? 그러고 보면 그날 윤정의 여동생도 이 사람도 둘을 같이 봤는데, 얼굴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착각하지도 않았다. 정윤과 윤정에게 일어난 일이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걸까?
성우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정윤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누나, 혹시 윤정이 좋아해요?”
그 물음은 정윤의 이마 한가운데로 닥쳐 와 시야를 노랗게 가렸다. 머릿속이 왱왱 울렸다. 중학생 때 학교 뒤편 골목길을 걷다가 못생긴 게 지나간다는 이유로 논다는 애들에게 걷어차이고 맞았을 때도 이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뭐…라고요?”
입속이 말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입술을 떼어 되묻자 남자가 슬쩍 웃었다.
“진짠가 보네? 에이, 뭐 어때요. 그럴 수도 있지. 예전에도 있었거든요. 윤정이 좋아하는 여자. 윤정이가 그래서 누나 좋아하나 봐요. 관심 받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뭐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게다가 왜 이렇게 태연한 거고? 근데 윤정일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고?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정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 저, 그럼……윤정이한테 말 안 하실 거죠?”
제발 그렇다고 말해. 제발. 정윤은 빌고 빌었다. 미대 원서를 썼을 때 이후로 이렇게 무언가를 간절히 빌어본 적이 있나 싶었다. 망할 놈은 자꾸 뜸을 들였다. 밥솥이라도 되는 건지.
“근데 누나, 왜 남자랑 데이트하는 거예요? 남자랑도 할 수 있어요?”
하긴 뭘 해? 슬슬 짜증이 났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니 이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건들거리는 꼴이 보였다. 그 앤 이 남자와 몇 년이나 사귀었댔지. 누구와 섹스하는 걸 더 좋아할까? 이 사람과 잔 뒤 나한테 온 날도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는?
정윤은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 끼어든 불청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윤정과 함께 있을 때면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는 정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했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댔으며 스킨십의 강도도 높아졌다. 섹스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생각도 금세 희미해졌다.
윤정은 이 녀석을 왜 계속해서 만나는 걸까? 생긴 건 번듯하긴 했지만 그뿐 아닌가? 나와 하는 만큼 이 남자와도 섹스를 많이 할까? 윤정에게는 죄책감 따윈 없는 걸까? 정윤을 그렇게나 좋아한다면 이 남자와 자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글쎄요. 볼래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성우가 살짝 놀란 듯 눈을 한 번 치켜뜨더니 빙글빙글 웃었다.
“장난이죠?”
“장난이죠.”
웃지도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웃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누나 혹시 요 바로 뒤편에 모텔 있는 거 봤어요?”
정윤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시선을 돌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수리까지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목을 누군가가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윤정이가 그쪽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요?”
“궁금하죠? 윤정이, 나랑 할 때 어떤지.”
윤정은 이 자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정윤에게 남자친구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쉽게 싫증내고 참을성 없는 그 성격에 몇 년이나 만나온 걸 보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건 분명했다.
정윤에게 보여주던 정열적인 눈빛과 열띤 목소리, 애정 어린 몸짓은 다 거짓말이었던 걸까? 아니면 이놈을 속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정윤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옆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윤정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아니면 속고 있는 건 바로 정윤 자신인 걸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손끝으로 맥박 뛰는 것이 느껴졌다.
“모텔까지 갈 필요 없어요.”
정윤은 남자의 팔을 붙잡고는 상가 건물 뒤편의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한 칸밖에 없었고, 아주 더럽지는 않았지만 좁았으며 축축했다. 그는 성우를 끌고 들어간 뒤 문을 닫고 잠갔다. 딸깍,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손등을 때렸다.
시종 여유 넘치던 성우는 좀 당황했는지 공공장소가 어쩌고저쩌고 두서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공공장소는 무슨. 웃기지도 않네. 그렇게 싫으면 왜 얌전히 끌려 들어오는 건데? 정윤은 한마디 쏘아붙이고픈 것을 억누르며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바지를 벗어버렸다. 윤정의 앞에서는 너무 떨려 손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남자는 정윤을 한 번 쳐다보더니 따라서 바지를 내렸다. 앞섶이 불룩한 남자의 팬티를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진짜 신기하다.”
그 말에 되레 신기해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혹시 남자랑 처음 해요?”
“근데 화장실에서 하고 싶겠어요?”
이 발정 난 어린놈에게 이 이상 도취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돌출된 성기를 가진 인간과 짝짓기하는 게 처음이든 아니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정윤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남자를 끌어당겼다.
섹스는 금세 끝났다. 기대치가 바닥이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좋지도 않았다. 삽입용 기구를 몸에 달고 다닌다는 건 참 편리하구나,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 부분이었다.
“이제 공범이네, 우리.”
성우가 바지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윤정이한테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하하, 누나 되게 무서운 사람이다.”
이 새끼는 왜 갑자기 말을 놓고 지랄이지? 정윤이 반말도 하지 마시고요, 쌀쌀맞게 덧붙이자 성우는 키득거리며 네에 누님, 하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정윤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건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오매불망 윤정만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지는 않을 거라는 점을 어필할 기회. 상처를 주면 물줄도 알고, 네 장난감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고 보여주면…윤정이 긴장감을 가질까?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줄까? 참 나, 그런다고 걔가 정말 긴장하고 신경을 쓰겠어? 어쩌면 실망하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콧방귀도 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윤이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섹스를 하든, 아무 관심 없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윤은 맥없이 지하철 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온통 어둠으로 드리워진 여자가 검은 유리에 비쳤다.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웹툰을 보고,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맨몸으로 나와 침대에 누운 뒤에야 지훈을 피자 가게에 홀로 둔 채 바람맞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