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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옵니언 Jul 24. 2023

부유하는 시간 속 자기 구원적 필름 메이킹

비 간, 〈카일리 블루스〉 리뷰

     <카일리 블루스>는 중국 영화감독 비간의 장편 데뷔작으로 2015년에 제작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차기작인 <지구 최후의 밤>이 먼저 개봉하였고 명성을 얻으면서 <카일리 블루스> 또한 2023년에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하게 되었다. 

     큰 틀에서 영화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이 영화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카일리의 거주하는 시인이자 의사인 천성(진영충)이 버려진 조카 웨이웨이(페이 양 루오)를 찾아 전위안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 길에서 당마이라는 마을을 통과하며 천성의 과거, 현재, 미래가 꿈 같이 뒤섞이며 배열된다는 점 또한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비간 감독은 1989년생으로 아주 젊은 감독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기 전에 시인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에 시라는 소재를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반복되고 있다. 그의 영화에 비약과 생략이 잦은 이유나 관념을 시각적 형태로 변환하려는 시도는 시를 쓰는 방식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자신이 쓴 시가 곳곳에 등장한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주인공이 직업을 시인으로 설정되며 나오는 시나 <지구 최후의 밤>에서 침대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남자가 읊는 대사 또한 그가 직접 쓴 시이다.

     비간 감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잠입자>(영제 :Stalker)을 보고 영화감독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간 감독의 영화에서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 인서트나 롱테이크 장면들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번 영화 <카일리 블루스>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비간 감독은 이러한 장면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생각하며 영화를 감상한다면 더욱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영화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래는 인용된 구절이다.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많은 나라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란 모두가 마음 아닌 것을 설(說)함이며 그 표현을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란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카일리 블루스>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며 주인공 천성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마음 또한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시퀀스부터 시간과 꿈을 혼재시키며 영화는 진행된다. 현재 시점의 천성은 시인이자 의사다. 그리고 그에겐 동생과 웨이웨이라는 조카가 있다. 천성의 동생은 도박에 빠져 자기 아들 웨이웨이를 집에 가둔다. 그 무렵 천성은 계속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꿈을 꾼다. 설상가상으로 동생은 전위안에 사는 자신에 친구에게 웨이웨이를 팔아버린 듯 보이기도 한다. 천성은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집을 동생에게 주는 대가로 웨이웨이를 찾아 같이 살기로 한다. 로드 무비의 특성상 본격적인 여정을 떠나는 이 지점이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전위안으로 떠나는 여행에 목적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 조카 웨이웨이를 찾는 것 또 하나는 같이 일하는 노의사의 첫사랑에게 부탁한 물건(셔츠, 사진, 테이프)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꿈을 통해 천성의 과거 서사가 진행된다. 그는 징역을 살았고 그 사이 아내가 죽었으며, 어머니가 남겨주신 돈으로 현재의 의사가 된 배경이 나온다. 잠에서 깬 천성은 터널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 또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열차를 내린 듯한 천성은 한 남자에 의해 당마이라는 공간에 도달한다. 천성이 그 남자와 당마이에 도착한 후에는 롱테이크로 당마이라는 공간을 훑게 된다. 무려 주인공인 천성까지 던져둔 채 말이다. 이후 돌아온 카메라는 이발소의 천성을 잡는다. 천성은 이발을 해주던 여자에게 지인의 이야기라는 변명 아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왜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속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마이에서 천성은 자기 동료 노의사가 전달해 달라고 물건 중 두 개를 잃게 된다. 셔츠는 자신이 입음으로써, 테이프는 자기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 여자에게 선물한다. 시간이 돼서 다시 진위안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을 당마이로 안내했던 그 남자의 이름이 웨이웨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위안에 도착한 천성은 웨이웨이 데려오지 못하고 동료 의사의 첫사랑이 집을 찾아가지만 이미 죽은 상태라 물건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천성은 다시 카일리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카일리 블루스>에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공간에 따라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의 힘을 빌려 영화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흩트리는 방식의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감독이 영화 속에서 사용하는 소재에서 알 수 있다.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으며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열차, 오토바이, 배 같은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시간이란 흐른다는 절대적 진리를 자신의 개념으로 다시 정의하려는 듯했다. 등장하는 시계(시간의 상징물)는 특이하기 때문이다. 먼저, 당마이에서의 웨이웨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양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 카일리에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듣고 기차에 시계를 그린다. 그리고 실제로 달리는 열차에서 본 시계의 시간은 뒤로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대로 흐르는 시간, 과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천성은 자고 있으므로 실제로 시간이 뒤로 흐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꿈에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또한 어린 웨이웨이가 시계를 그리는 장면도 있다. 그리고 땡중이라는 인물의 아들이 죽은 후 꿈에서, 꿈에서 계속 시계를 달라 하여 시계 그림을 그려 불태웠다는 대사 또한 등장한다. - 천성은 그렇게 죽임을 당한 땡중 아들의 복수를 하고 감옥에 가게 된다. 위 장면들에서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다. 멈춰 있는 시간은 현재를 의미한다.  

     반면 영화의 후반부, 웨이웨이를 찾기 위해 땡중을 만나는 장면에서 천성이 단추를 올려두는 시계만이 영화 속에서 정방향으로 흐르는 시계라고 할 수 있다. 흘러갈 예정인 시계는 흐르는, 흘러간 시계와는 다르게 미래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모두에게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각 개인에게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다. 이런 장면을 통해 우리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깨고 영화 속에서 만큼의 시간은 감독에 의해 흐른다는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시는 모두의 언어를 시인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비간 감독의 필름 메이킹에서 보이는 이러한 작업은 관념에 대한 재해석이고 관객에게 모두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또 나아가 어떻게 영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위에서의 시간에 대한 분석은 감독이 왜 시간을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에서 시간을 흩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이제 감독이 영화의 후반부에 적용된 롱테이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간 감독은 천성이 당마이에 도착한 후, 꽤 긴 시간을 롱테이크로 처리했다. 롱테이크 촬영은 시간을 가두는 방법이다. 즉 영화에서 흐른 시간과 우리가 실재하고 있는 공간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방법은 두 세계의 시간을 같이 흐르게 함으로써 영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간 감독은 가장 리얼리티한 방법을 가장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사용한다. 당마이라는 공간을 생각해 보면 정말 천성이 갔다 온 공간일 수도 있지만 꿈에서 들린 공간일 수도 있으며 어느 부분은 실제, 어느 부분은 꿈이 합쳐진 곳일 수도 있다. 이는 열차에서 천성이 계속해서 잠에 빠져있었으며, 바로 뒤에 등장하는 장면의 외곽을 흐리게 처리하여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든 부분과 웨이웨이라는 인물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당마이에서 등장하는 웨이웨이는 자기 조카와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일리의 가이드를 꿈꾸는 양양보다 카일리에 대한 정보를 잘 아는 장면은 양양에게 여러 번 들었다고 해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마치 진위안에서 카일리로 데려오지 못한다는 가정 아래의 웨이웨이를 상상하는 미래 같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롱테이크 방식과는 다른 결과물을 도출한다. 카메라를 따라가며 시간이 흐르게 두는 동안 우리는 리얼리티를 확보한다기보다 인물 간, 소재 간 혹은 사건 간의 간격을 늘려 몽환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기나긴 롱테이크를 보다 보면 우리는 감독이 영화 속 얽힌 시간과 인물 사건 속에 다양한 소재를 같이 섞어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지의 반복은 인물 혹은 시간, 사건의 관계 속에서 묘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가령 인물 간의 연결성을 만들어 주는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에 천성과 동생이 각기 다른 시퀀스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동생이 잡은 물고기는 매우 작은 물고기이며, 그것을 잡은 후 거북이의 먹이로 준다. 반면 천성은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 동료 의사 집에 두고 자신이 카일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같이 먹자는 말을 남긴다. 또, 위의 언급한 웨이웨이 또한 그렇다. 

     이외에도 소재를 엮어 둔 부분도 여럿 보인다. 먼저 붉은 천을 이야기할 수 있다. 붉은 천은 천성과 같이 일하는 노의사가 꿈에서 아들의 오토바이(과거)에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천은 천성의 동생 오토바이에도 보이며(현재) 당마이의 웨이웨이의 오토바이에도 양양이 달아준다(미래). 또한 묘족이 연주하는 루성 연주 또한 그렇다. 천성이 꾸는 어머니의 꿈(과거)에서 당 마이로 향하는 길에서(미래), 노의사의 첫사랑 장례식(미래)에서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된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재정의하는 역할도 하지만 천과 루성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건의 이미지는 어떻게 엮여있는지 보자. 먼저 땡중의 아들과 웨이웨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땡중의 아들은 작중에서 손목이 잘려 죽은 후, 꿈에서 시계를 달라 하여 시계를 그려 태운다. 즉, 땡중의 아들은 시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계속해서 시계를 그리는 웨이웨이의 행동과 묘하게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의 초반부 천성의 동료인 노의사가 자기 아들이 꿈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다. 오토바이에 천을 묶고 타고 가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인데 천성이 출소 후 듣는 라디오에서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 소년의 자전거에 천이 묶여있다는 내용도 함께 담겨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장면들에서 시간과 인물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혼잡하게 배치되어 있다. <카일리 블루스>를 보고 나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몽환적이라는 감각일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감각을 느끼는가에 대답은 이러한 구조와 배치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제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그래서 감독은 왜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고, 재정의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속의 원시인에 통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인은 위의 문단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원시인이 웨이웨이를 쫓아가고 있다는 대사가 나올 뿐 아니라, 갈색 털로 뒤덮이고 반짝이는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졌으며 사람을 보면 뒤쫓아가 사람의 ‘뒤’에 붙어 안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라디오에서는 원시인의 나타났거나, 원시인을 목격하여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 당마이에서 만난 웨이웨이는 원시인이 다시 안으려고 할 때,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면 도망간다고 말해준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원시인은 특정한 존재라기보단 자신의 과거라는 생각할 수 있다. 원시인은 항상 누군가의 뒤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존재는 무엇이든 원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떨어뜨리는 방법 또한 간단하다.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는 것.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 행하지 못해 사고가 나기도 한다. 이는 과거에 발목이 묶여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떤 인물을 대신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천성의 경우는 다르다.



     이 영화를 통해 비간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를 구원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영화에서의 천성은 과거의 미련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실수로 감옥에 갔고 그 사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내와는 이혼했으며 이후 아내는 병에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현재는 조카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천성의 뒤에는 계속해서 야만인이 뒤에 달라붙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카일리에 9년 만에 원시인 나타났다는 라디오가 나오는 장면은 웨이웨이가 진위안에 가게 되고 그가 어머니의 꿈을 꾸며 동료 의사에게 털어놓는 부분과 겹친다. 야만인이 카일리의 등장하는 부분은 그가 자신의 과거에 되돌아보고 털어내지 못하는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위안으로 향하는 길, 당마이에서 그는 스스로 삶을 구원해 낸다. 먼저 그는 당마이의 이발사 여자에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돌고래를 보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면서 돌고래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겠다며 이발사의 손으로 손전등의 불빛을 가린다. 천성의 행동은 동료 노의사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노의사의 첫사랑이 너무 추워하는 자신을 위해 손전등의 열이 따뜻할까 싶어 손을 손전등 불빛 위에 올렸다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대로 행한 것이다. 노의사의 첫사랑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의 감정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천성은 이발사를 그의 아내 장시와 같은 위치로 두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밴드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조금 더 확고해졌는데 영화의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시퀀스에서 한 남자가 천성에게 아내 장시도 원한다며 노래 한 곡을 부르라고 하지만 천성은 결국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천성을 보고 이발사는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고 말하고 노래의 종반부에서는 눈물을 훔친다. 즉 당마이라는 공간이 천성의 꿈이라면 그는 예전에 아내에게 해주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웨이웨이가 진위안으로 가는 항구에 내려줬을 때 꿈에서 나왔던 물에 잠긴 어머니의 신발이 멀어지는 장면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웨이웨이가 운전하는 동안 천성이 지나온 당마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자신의 과거를 털어버린 후련함과 애절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노의사가 천성에게 부탁했던 물건은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의사와 애인이 헤어진 시기가 중국의 문화 대혁명 시기이기 때문이다. 동료 노의사는 그에게 자신의 전 애인에게 전해달라며 세 개의 물건을 맡기는데, 그중 셔츠는 천성 자신이 입어버림으로써, 테이프는 이발사에게 줘버리며 무산된다. 또한 마지막 남은 사진은 도착 전에 노의사의 전 애인이 죽어버림으로써 소용이 없어졌다. 이는 중국의 역사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는 스스로 과거로부터 구원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과거에서는 단절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결국 어떠한 방법을 택하든 천성은 두 과거에서 멀어진 인물이 된다. 그렇기에 당마이를 떠나는 웨이웨이가 해준 각목(원시인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기 위한)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각목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당마이 이후 그의 모습은 그 전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 땡중에게 당장 웨이웨이를 데려가지 않고 내일 수업 시간에 필요한 단추를 놓고 나오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혹은 시간은 망원경을 통해 관조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그는 종반부에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자 반대로 달리는 기차에는 웨이웨이가 그린 듯한 반대로 흐르는 시계가 그려져 있다. 천성이 반대로 흐르는 시계를 보고도 눈을 감고 잘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거나, 과거를 당당하게 마주할 용기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천성의 목소리를 빌려 시를 읊는다. 그가 시인인 이유도 자신의 감정을 되짚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의 쓸쓸한 감정을 되짚거나(전과 같이 열리는 몸의 옷장 / 섬유 속을 통과하는 물 분자들),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거나(사람들은 한 때 / 사진이 영혼을 빼 앗아 간다고 믿었듯 / 당신이 내 영혼을 찍어 / 빼앗아 갔다) 혹은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비유적으로 전달하고 하는 방식(산은 / 산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영화에서 시간을 흩트리고 길게 늘이면서 보여주는 이미지들과 맞닿으며 증폭시켜 전달한다. 한편으로는 이것 이 시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비간 감독은 그것을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해낸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비간 감독은 영화가 영상매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같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부분에서 <지구 최후의 밤>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카일리라는 공간, 인물의 설정, 프레임을 채우는 정지된 화면과 롱 시퀀스,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 로드 무비라는 구조적 특징 같은 것을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더 날 것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배우나 영화의 플롯이 그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먼저 <카일리 블루스>의 배우는 대부분 비전문 배우다. 가령 이 영화의 주인공 천성조차 비간 감독의 삼촌이 맡았다는 후설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비간 감독의 이번 영화가 인물의 통해서 서사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요한 감정은 연기보다는 시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완전하게 배우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배우의 영향을 받는 여러 장면을 관람자는 어색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감독이 주제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관념에 대한 접근 방법에서도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지구 최후의 밤>에서는 관념과 현재에 대한 확실한 구분이 지어진다. 하지만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모호하고 더 원초적 차원에서의 접근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또한 롱테이크를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차기작이 <카일리 블루스>보다 훌륭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똑같이 비현실적 공간에서 롱테이크를 사용하지만 <지구 최후의 밤>에서의 활용이 더욱 효과적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계속해서 비현실적 요소들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현실의 시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과정이 영화를 더욱 몽환적이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반면 <카일리 블루스>는 우리가 직접 비현실적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조금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비간의 영화에서는 특히 물과 불의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실제로 두 작품 모두에서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구 최후의 밤>에서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을 통해 시간대를 이동시킨다거나, 상승하는 불의 이미지와 대립시킨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대조적으로 위치시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안개(물+불)의 이미지 또한 흥미로운데, 안개가 무언가를 가리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보를 보이는 프레임과는 별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안개의 이미지를 비틀어 내기도 한다. 이것은 초반에 언급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시간대가 복잡하고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이것은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사 뒤로 숨겨놓은 것도 모자라 시라는 비서사적 요소를 끌고 와 다시 한번 비튼다. 이는 영화 속에서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장면을 가져다 두고 이해하기엔 덜 보여주는 방식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영화 속 시간을 복잡하게 비틀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시는 한번 읽어서 감정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같은 의미로 비간 감독의 작품은 한 번에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좋은 것이 있지 아니한가. 오래 씹을수록 단내 나는 밥알처럼. 그게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같은 이유로 비간 감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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