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멜 Jul 18. 2023

착한 사람이고 싶지 않은 착한 사람의 자기소개서

무색무취 속에 가려진 컬러풀한 내 취향 기록

모든 사람은 ‘인상’을 남긴다. 그게 좋은 인상이든 나쁜 인상이든.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1년 전쯤이던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느라 평소 좋아하는 건 뭐냐, 싫어하는 건 어떤 게 있느냐 끊임없이 물어봤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경쾌하게 답변을 하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의 사람이었다.


개성이 약한 사람은 더러 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런 개성과 색깔이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 날 이후부터  나의 ‘취향’에 대한 고민은 시작됐다. 사실 나 역시도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 상대가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장소를 대게 맞춰주곤 하기에 타인이 내 취향을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나와 처음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너 착하구나’라는 말을 항상 건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길을 걷던 중 마주친 가게 그라피티


처음에는 ‘착하다’는 좋은 의미의 단어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말을 반복해서 들을수록 “나에게는 ‘착함’ 이외의 매력은 없는 건가?”라는 의문이 마음속에 자라났다. 그리고 ‘착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에 나는 자격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주위에 좋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런 내 ‘착한’ 성격을 당연시하고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이 같은 자격지심이 더욱 강해진 것 같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나라는 사람의 다른 정체성을 갖기 위해 나는 휴대폰 속 메모장에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적어 내려갔다.




먼저, 가장 쉬운 ‘취미’부터 이야기하자면 평소에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영화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영화관에 가서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며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의 대화 소리가 사그라드는 때, 나는 마음속에 있던 온갖 잡념을 다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나는 그 잡념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내려간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다시 조명이 들어올 때면, 혼자서 부지런히 돌리던 마음속 고민을 멈추고 눈앞의 현실로 돌아온다.


노래 취향은 ‘가사가 와닿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이브를 할 때면 마치 이별 택시에 탄 듯 실연의 아픔으로 뒤범벅된 플레이리스트로 차 안이 꽉 채워진다. 그런데 웃기게도 최애 음악은 달콤함의 끝판왕인 슈가볼의 ‘머리 쓰다듬지 마’이다. 가장 좋아하는 스킨십이 머리 쓰다듬기인 나에게 이런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었다. 들을 때마다 설렘 지수가 100 이상으로 치솟는 느낌이다. 머리 쓰다듬기는 여자들의 설렘 포인트라고 생각했는데 이 포인트를 남자 보컬이 불러준다니! 듣기만 해도 두근거릴 수밖에 없다.


드라이브를 하던 중 마주친 산뜻한 하늘의 모습


여행지의 경우에는 수많은 여행지를 가봐도 아직까지 제주도를 이길 수 있는 곳은 만나지 못했다. 제주도에는 유럽의 멋진 건축물도, 뉴욕의 화려한 브로드웨이도, 일본의 맛있는 음식과 술도 없지만 어딘지 모를 정겨움이 있다. 사실 제주도에 가서 도민 분들의 정겨움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는 키 낮은 돌담이 ‘우리는 정이 많은 마을이에요’하며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제주의 드넓은 푸른 바다와 검은색 돌담의 대비를 보면 제주 마을의 소박한 정취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사람은 독립적인 성향에 끌린다. 독립적이라고 해서 칼 같이 선을 긋는 차가운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독립성’이란 자신의 일상 속에서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낌없이 보여주고, 또 스스로 결정하고 지켜나가야 할 부분은 자신의 주관대로 행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모습을 완벽하게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내가 가지지 못한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 더욱 끌리는 것 같다.


로제는 아니지만 술안주로 좋은 기본 떡볶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음식. 나의 소울푸드는 두말할 것 없이 떡볶이다. 특히 엽기 떡볶이 로제 오리지널에 중국당면을 토핑으로 추가해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엽떡은 떡과 어묵을 반반으로 해야 하고 중국당면은 충분히 익혀달라는 요청 사항을 따로 적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편한 옷을 입은 채로 엽떡을 먹으며 TV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나에 대해 적어 내려간 뒤 만나는 사람마다 나 자신을 열심히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첫 만남에서 종종 ‘착하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취향이라 썼지만 뭐 하나로 모아지는 키워드는 없다. 클래식, 아기자기함, 귀여움, 시크함 등등.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단어가 있지만 그중에 나는 결국 ‘착함’으로 귀결되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조금 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취향들을 조금 더 갈고닦고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착함’보다 앞서는 또 다른 키워드를 하나 만들고 싶다. 아마 나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만드는 게 2023년의 프로젝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