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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 Aug 06. 2023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 이끌어준 집

별의별하우스의 시작1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활보하며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며 까르르 웃었던 기억, 집 앞 넓게 펼쳐진 논에서 개구리와 올챙이를 만났던 기억, 논이 추수를 하고 나면 그 논바닥에서 뒹굴고 볏짚에서 구르고 쥐불놀이를 했던 기억, 집 뒷동산에 올라 미끄럼을 타고 대나무 숲 작은 공간을 친구들과 '아지트'로 부르며 모여들었던 기억, 언제나 집 밖을 나가면 동네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이 있었고 그들과 나이 먹기, 동그랑땡, 막가치기, 구슬치기 등을 하며 놀았던 기억,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동네 여기저기서 "00아 밥 먹어"라는 엄마들의 외침 소리에 아이들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


언제부턴가 그런 기억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 회복하려는 의지에 불을 지피는 것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20대 마지막 해, 나는 나로 살고자 마음을 먹었고 그 의지는 나의 충만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가득 안고 있는 고향으로 다시금 향하게 하였다.




전주로 오면서부턴 건축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건축공학과를 다니며 아뜰리에에서 알바를 하고 고건축에 매료되어 한때 고건축사무소에 다녔던 경험은 있었지만 그 일들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다. 일은 재미있었고 좋은 분들을 만나 제대로 일을 배우는 기쁨도 있었지만, 건축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한정하고 작업을 하는 것이 나와는 딱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전주에 돌아온 후부턴 딴짓만 찾아 했다. 연극, 영화, 음악 공연 등등 예술 방면으로 마음을 두고 활동을 했다. 지근거리에서 날 지켜본 사람은 늘 내게 "넌 딱 기획자야"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엔 내가 '여배우'를 꿈꾸고 있었기에 '기획자가 뭐야'라는 시큰둥함으로 흘려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난 지근거리 사람의 말대로 '기획자'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공연장의 배우들을 보면 경외감에 휩싸인 나머지 '어후 내가 어떻게 배우가 된다고 했을까, 정말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뭐야.'라며 배우의 꿈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전주 구도심의 옛 전북도청사를 계기로 난 기획자가 되었다. 결국. (옛 전북도청사는 내게 아주 긴 이야기이므로 따로 쓰겠다.) 이후 도시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도시의 역사와 전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도시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 건축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을 던지는 공론장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의 도시 기록자들을 초청하여 지역 시민들과 함께 한 <도시여, 사람을 품어라>, 그 도시 기록자들과 각 지역을 돌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로컬 네트워크>, 전국 곳곳에서 꽤 빛나는 활약을 하는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만만한 건축, 사람과 만나다>라는 별의별 건축가 시리즈를 기획하기 시작했고 잠시 몸담았던 주거복지센터에서도 <주거의 재발견>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주거와 관련한 문화와 복지 시스템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러 진중한 분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내가 살고 싶은 동네는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이 내 안에 콕 들어왔다.

그 질문은 곧바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유년시절을 만들어줄 수 있는가'로 이어졌다. 나의 유년시절이 나를 충만하게 했듯이 내 아이들도 평생을 살아갈 튼튼한 뿌리를 갖게 해 줘야겠다는 마음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의 둥지 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보지는 전주의 구도심 저층 주택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진북동, 태평동, 완산동, 서학동, 노송동... 틈만 나면 남편과 돌고 돌고 돌며 집과 동네를 보았다. 우리에겐 집도 집이었지만 동네의 분위기와 풍경이 매우 중요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인가, 아이들이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는 곳인가, 이웃들과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등등을 고려하며 찾다가 두 군데 집이 계약 직전에 성사가 깨지고 말았다. 한 곳은 주인 자녀들의 변심으로, 한 곳은 다운계약서를 제안해서.

서학동은 친분이 있는 예술가들이 있어 그 커뮤니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고 찾았지만, 이미 값이 많이 올라 우리 수준에서 집을 살 수도 없는 곳이 되었다.

집 찾기를 거의 포기한 듯했던 어느 날 남편이 보낸 어느 집의 사진. 그곳은 수년 전 남편과 내가 함께 그 집을 보며 "와! 여긴 어떤 건축가가 지었나 봐." "와! 그러게 뭔가 아우라가 있어." "와!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와! 그러게" "와! 여기 동네도 너무 예뻐" "와! 진짜" "와! 여긴 뭔가 품격이 느껴지는데?" "와! 전주에 이런 곳이 있었네?" 연신 와! 와! 거리며 보았던 그 집이었다. 그게 주문이었을까?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이런 걸까?

2015년도 처음 뜰에 들어서서 본 집


남편과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 세상에 나갔다가도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집을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에 들떴다. 이곳에서 유년을 보낸 아이들이 부디 건강하고 튼튼한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기만을 바라며 설렜다.

오래되고 낡은 집이지만 이 또한 새로운 것보다 오래된 것에 마음이 가는 우리의 취향이리라. 집에도 이러한 눈 맞음이 있는 모양이다. 묘한 이끌림에 매료되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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