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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 Aug 29. 2023

그 시절, 나의 모양을 다듬어가던 시간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간 시간-공간-사람

 예기치 않았던 사수 끝에 인천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인천이라는 대도시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신입생들을 보며 그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란 순진한 생각만 가득했던 터라 입학하자마자 춤 동아리, 관현악 동아리, 학생회, 운동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수업도 공대 필수보다 인문대 철학과 미학 분야 수업을 들으며 학사 조건은 아랑곳없이 나만의 취향으로 학사 커리큘럼을 만들어갔다.      


 학부 3학년 때 설계실에서 늘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이던 때였다. 서서히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내게 신나는 일감을 주는 것처럼 고건축 동아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을 모아 답사를 다녀야겠다는 아주 단순한 의도였지만, 매달 전국 답사를 다니고 학교 지원을 받아 중국 답사까지 다녀와서 한-중 전통 건축 비교에 관한 보고회를 열 정도로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처음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일은 다른 학교 교수님과 그 연구실, 또 그 교수님이 소개해준 중국의 건축가와 대학 연구원분까지 네트워크가 확대되었다. 

 나의 시작은 거의 늘 이렇게 미약하였지만, 도중엔 일이 커질 대로 커졌다. 그 과정엔 여러 사람의 '돕는 손'이 꼭 있었다.     


 이렇게만 끝났다면 얼마나 환상적인 대학 생활이었을까! 인생은 찬란한 시간을 주는 대신 곱절의 혹독하고 부끄러운 기억을 남기면서 겸허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우쳐주는 듯하다.     

 문과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학과 공부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공업 수학에선 수학 정석의 수학 2를 가지고 밤새 씨름을 하였고 구조역학은 삼수강을 했는데도 D를 면하지 못하여 내가 구조역학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대학원 선배들이 삼수강하고도 D 학점을 맞은 신기한 애가 있다며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공대에 가서 피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하면서 '내가 이 정도로 바닥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대외적으로는 공부엔 뜻한 바 없는 열정적인 놀자파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어떻게든 공부를 해보고자 몸부림을 쳐댔던 시간이 있었다.


 술은 웬만한 공대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먹고 마시고 정신없는 날을 많이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남는 건 사람이지!'라는 외침으로 외롭지 않을 앞날만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놀고 생산적이지 못한 일들만 잔뜩 하고 다닐 때 다른 친구들은 토익이며 건축기사, 학점 관리, 공모전, 부전공까지 어쩜 그렇게 인생을 차곡차곡 준비를 잘하고 사는지, 경이로웠다.     


 3학년이 끝나고 1년의 휴학 중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원룸은 경매로 넘어가고 당시 남자친구의 데이트폭력과 동아리에서의 집단 괴롭힘 등의 악재가 동시에 겹쳤다. 온갖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는 문은 내가 입신양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돌연 행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행시 공부를 하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정치, 행정, 법,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공부는 설계실에서의 그것과는 절대적으로 달랐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전까지 얼마나 내가 무지했던가를 절실히 깨달으며 부끄러움에 몸서리칠 때도 있었다.    

 

  일과 병행하며 3년여간 이어오던 어느 날, 거울 속 내가 완전히 피폐해져 빛을 잃은 낯선 모습으로 비친 것에 충격을 받고 마음을 접게 되었다. 그 순간 '나의 빛났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고등학교 때 문학동아리 선배였다. 수소문 끝에 서울에서 살고 있던 선배를 대학로에서 만났다. 그날 그 선배와 나눈 대화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시켜 주는 단서가 되었고, 선배와 끊이지 않는 대화 속에서 나의 모양과 빛깔이 분명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점이었던 것 같다. 고향으로 향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은.         

          

 아무런 경력도 경제력도 없이 털래털래 기어들어 간 고향 집에서 나를 반길 리 없었음에도, 인천과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 숨을 쉴 수는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끊고 돌아갔다.     

 아버지가 부재한 집은 매일 위태로웠다. 당장 할 수 있는 학원 강사, 과외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았다. 그리고는 중학교 때 교회 선생님과 연극을 보았던 것이 기억이 났고 그때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 생각났다. 고시반 친구들에게도 행시에 실패하면 연극배우가 될 거야라고 말을 했던 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순간 곧장 창작극회를 찾아갔다. 그때가 스물아홉 살의 해 1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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