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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 Jul 18. 2023

별의별하우스의 시작

나를 풍요의 세계로 이끄는 시간-공간-사람들의 이야기 3

2018년 7월,

B라는 사람이 철봉집에 왔다.

B에게 철봉집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려던 A라는 사람이 있었다.

A는 철봉집이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이 되고, 이곳에서 이런저런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B는

"왜~???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걸 만든 거야?"

이런 반문을 한 예닐곱번은 한 것 같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그랬다.

"그냥 우리 애들 놀이터로 만든 거예요!"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


B는 시청 공무원이었고, A는 어떻게든 관에서 철봉집을 밀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어렵게 하고 있으니 시에서 관심 좀 갖고 지원해 달라. 이렇게 철봉집을 어필해주고 있었다.(나도 못하는걸;;)

당최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투로 "왜?"라고 말하는 사람한테는 시간이 필요한 거지,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써주는 A에게 미안한 맘에, 내가 직접 B에게 철봉집을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재개발로 사라질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기억하고 그 사람들의 입으로 말해줬으면 했다고. 이런 곳은 남겨져야 한다고.

또 한참 듣던 B는 이런다.

"난 또 마을 공동체를 위해서 뭘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네요."

......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난 한때 전주의 '빈집 재벌'로 불리던 사람이다. 처음엔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쩌나 염려하다가 '뭐, 없어 보이는 것보다 없어도 있어 보이는 게 낫겠지!'라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러고는 나도 나를 소개할 때 종종 '빈집 재벌'이란 말을 쓸 때도 있었다. 물론 '임차인'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 늘 어려웠고, 사람들도 '공무원', '선생님', '그냥 회사원'... 이렇게 알맞게 떨어지는 직업이 아니라 이것저것 하는 기획자 혹은 활동가에 대한 이해를 늘 어려워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아마도 사람들의 상식 밖의 일을 하며 살았나 보다.


고백하자면 난 ENFP다.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경계가 없고 불가능하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규칙적/관습적으로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도 내 영혼이 이해하지 못하면 도무지 그걸 따르기 어려워하는... '똘끼 다섯 스푼에 불꽃 다섯 스푼 허당끼 세 스푼, 긍정에너지 여섯 스푼, 분노를 에너지로 바꾸는 발전기 일곱 스푼, 오지랖은... 아이코! 쏟아졌네!'의 결과로 태어난 것만 같은 사람이다. (오해는 마시라,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설명은 장황했지만, 결국 난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별의별 하우스 시리즈는 전주의 구도심, 사람들이 떠나는 저층주거지에서 5년 간 일 년에 한 채씩 빈집을 고치면서 문화기획, 예술교육, 커뮤니티 관련 일을 했던 사업이었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부동산 투자도 아니었고 원대한 꿈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현장을 '목격'했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때는 2015년, 내가 목격한 현장은 우리 동네에 재개발로 묶여있던 기자촌 재개발지구(141,684.9㎡, 2,250세대 아파트 예정)였고, 그곳엔 다른 동네에 있는 경로당, 어린이 놀이터, 작은 도서관과 같은 공공시설도 없었고, 의원이나 약국, 목욕탕 등의 생활편의시설도 없었고, 도시가스 공사도 되어 있지 않았고, 노후된 주택에서조차 제대로 된 집수리를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곳>을 목격한 것이다.

2006년도에 재개발 추진위가 승인이 되었고 2009년도에 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으니 추진위 승인 이후로 2015년까지 10년 간 물리적인 행정서비스는 물론이고 이주가 늘어가고 빈집이 많아지고 관리가 안 되는 주택들이 많아지면서 슬럼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이곳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얼굴 없는 천사'가 매년 찾아오는데, 그분이 2000년도부터 동네 주민센터에 성금을 보내셨다고 하니 아마도 이 동네의 취약한 상황은 훨씬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가 예정된 곳이기에 공적 자금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지 않았던 걸까?  

"언제 철거될지도 모르는데 왜 거길 빌려?" 

"웬만하면 하지 마. 이제 곧 아파트가 들어설 건데 왜 그런 집에 돈을 들여?"

내가 그 재개발 지구 안의 주택을 임대하려고 했을 때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발동이 걸려 있었다. 공공에서 이러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안 보인단 말인가, 왜 여기선 다른 동네에서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한단 말인가, 우리 애들조차도 우리 동네에서 놀 곳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뭔가 '화' 비스름한 감정도 일었고, 당시에 기획프로그램을 할만한 장소를 찾고 있던 와중이라 '겸사겸사'한다는 생각에 시작했던 것 같다. 종합하자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못하게 해 놓고선 공공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화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가 빈집을 발견한 김에 겸사겸사'?


그래도 그 와중에 힘든 적도 있어서 가끔씩은 "누군가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으면 너도 하지 마."라는 지인의 충고가 메아리처럼 리플레이되는 때도 있었지만, 도무지 후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고 질주하는 바람에 그냥 앞만 보고 달렸다. 

내겐 "지금 당장"이 중요했다. 아파트가 지어진 후에 들어설 생활 SOC나 주변 생활여건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오늘',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누려야 할 '공간'이 중요했다. 또 누군가들에게 보여주며 말을 걸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공간들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런 무모함 덕분에 6년 동안 아이들의 아지트, 어른들의 모임, 각종 네트워크, 뭘 안 해도 좋을 공간을 부자처럼 누렸다. 이곳들은 흔히 말하는 그야말로 '제3의 공간'이었다. 그 사이 우리 집 아이는 둘에서 셋으로 늘었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철봉집을 계약했다가 만삭이 되어서야 오픈했다. 오픈 전날 처음 만난 분들이 나의 불룩한 배와 내 손에 들려있던 연장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연장을 들고 도와주셨던 기억이 있다. 매번 다른 집들을 오픈할 때마다 아이들은 "여긴 누구 집이에요?"라고 물었고, 누구의 집도 아니지만 본인들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공간이란 걸 서서히 알게 되었다. 각 집들의 공간과 분위기에 아이들의 반응도 매번 달랐던 것이 재미있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의 별의별하우스시리즈 프로젝트 주요 내용

별의별하우스 중 가장 활발하게 활용했던 사철나무집과 철봉집은 재개발구역 안에 있던 집이라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몇 년 후면 그곳에 지구의 기후위기를 앞당겨줄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미래일까?

 

별의별하우스의 집들은 모두 마당이 넓어 잡초와 화초, 그리고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던 곳이었다. 철봉집 동백꽃은 겨울 내내 꽃봉오리를 지켜내다가 아직 차가운 2월임에도 꽃잎을 틔웠고, 그즈음 사철나무집의 달래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봄빛이 감돌기 시작하면 수선화 새싹이 솟아오르는데 봄인 줄 어떻게 알고 나왔냐며 매년 감탄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사철나무집 감나무를 보고 감잎이 이렇게 싱그럽고 윤기가 나는 잎사귀인 줄 처음 알았다. 여름에 흐드러지게 피는 능소화와 철봉집엔 하얀색, 인봉집엔 진한 분홍색의 백일홍의 화려함에 입이 떡 벌어지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내게 반가움과 감동을 선사했던 집들, 나를 풍요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던 '집'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일 비가 무섭도록 내리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유독 마당 깊은 집들이 떠오르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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