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엣프피(ESFP) 편집자의 사회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요는, 부동의 F인 줄 알던 내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요즘 나 T인가?"싶을 만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뭐 그런 맥락의 글이었다. 그 후로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어떤 것이 변하고 어떤 것은 남겼을까?
나는 오래도록 'T형 인간'이 되고 싶었다.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불필요한 상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작은 것부터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이는 작업 과정이나 결과물에도 해당되지만, 주로 소통하는 데서 의도적인 노력을 발휘해야 했다. 텍스트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들면 (적당한 때를 봐서) 내가 해석한 의미가 맞는지 확인했다. 물론, 그렇게 물어봐도 된다는 관계의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MBTI를 다시 검사해 봤다. 오 마이가쉬. 스무 살 이후로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바뀐 적 없던 내 MBTI가 바뀌었다. 일상에서의 나는 여전히 F형으로 반응할 때가 더러 있어서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이제 내 MBTI는 INTP다(사실, 믿어지지 않아서 3번 연이어 다시 검사했었다). 노력하고 학습한 결과겠다. 나의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이성적 판단을 하는 데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나는 문제적 상황,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동적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사고를 하게 되었다.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워커홀릭인 줄 알았어." 가끔 나를 오래도록 봐온 지인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다.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고, 일에서 상당한 보람과 만족을 느끼고, 내가 하는 선택의 우선순위에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종일 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고 깨닫는 것들이 일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메모하고 나면 금세 잊어버린다. 특히, 쉬면서 보내겠다고 생각한 시간일 경우 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오랜 휴식이 불편하다. 그래서 남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긴 연휴가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그 시간 동안 평소 루틴과 다른 삶을 살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겪는 후유증이 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휴가 중에도 평소와 비슷한 루틴으로 살고자 한다. 그 시간에 '일'을 하지 않을 뿐. 그리고 평소에도 일상 틈틈이 'OFF'시간을 넣어두었다. 짧은 휴식에서 회복되고 충전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덕분이다.
나는 성취주의자다. 작은 일이라도 성공경험이 쌓일 때, 그리고 그게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 느껴지는 만족도가 높다. 이전의 나는 심각한 완벽주의자였다. 내가 세운 목표를 하나의 빌딩이라고 가정하면, 그 빌딩까지 올라가는 계단을 놓을 줄 몰랐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5천 보 걷기를 하고, 업무 시작 전에 필요한 공부를 해놓으면서 작은 성공경험들을 만들어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쌓인 '해낸 것'들이 일을 하기 위한 버퍼링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나아가 해내야 할 작업에서 필요한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서 매일 해야 할 일의 분량을 정했다. 처음부터 능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다 보니, 나에 대한 일 데이터가 쌓인 것이다. 그리고 '쪼개기'는 계획뿐 아니라 사고하는 것에서도 익숙하게 됐는데, 이는 어떤 일에든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안 해본 일에 대해 '어? 나 이거 할 줄 모르는데? 하고 발을 빼기보다, '해볼까?'하고 시도해 보려는 태도가, 덕분에 연결되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변하지 않고 남겨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내가 하는 일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작업물이 쌓이고 연차가 붙을수록 더해지는 책임감만큼, 더 잘 해내고 싶어졌다. 이제는 실수를 줄여나가는 것에서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책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손에 닿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익숙해진 작업과정은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해보지 않은 작업은 익숙해지도록 기꺼이 배우는 데 힘쓰고 있다. 내년 이맘때 나는 또 무엇이 변하고 또 남기게 될까?
길어 올린 문장
어느덧 모든 일은 빠르게, 감정은 저만치 보내서 여길 못 보게,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괴롭지만 않게 지내다 보니 회사 속에서의 나는 빠르게 변했다.
- <일하는 마음과 앓는 마음>, 임진아, '불안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