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이제 글을 쓰자, 생각하며 빈 페이지를 열었다. 괜히 열 손가락이 잘 움직이는지 확인하고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빈 페이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쳐다보기만 해도 생각이 글로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내게 그런 초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어째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그잔 가득 따뜻한 보리차를 채우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꼴꼴꼴. 타는 목마름을 해결했지만 여전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아, 오늘은 영 안 써지네. 내일 할까?'
안타깝게도, 글을 쓰겠다는 의지만 가지고는 절대 글이 써지지 않는다. 보통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하면 독서를 하지 않아서 인풋 경험이 없거나, 다양하게 수집한 생각을 숙성시킨 시간이 없거나, 혹은 글을 써내기 위한 몰입의 시간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작가들이 "글이 안 써진다"며 연락해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막힐 땐 전화하세요."라고 회신을 보낸다. 작가가 풀어내려는 생각만큼 내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대화하는 시간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 어디서부터 막히는지, 어떻게 풀어내고 싶었던 건지, 오늘은 뭘 하며 보냈는지 등 수다와 아이디어 회의를 넘나들며 1-2시간을 떠들고 나면 머릿속에 뒤섞인 문장들이 정리되는 것이다. 글 쓰는 시간은 작가가 철저하게 고독해지는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자인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환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안 써진다, 쓰기 싫다는 생각이 흐릿해지고 나면 '일단 써보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나 또한 작가에게 "일단 쓰세요."라고 한다. 백지를 채워나가는 게 어려워도 정해진 시간 동안 꾸준히 토해내는 경험이 쌓여야 글이 써진다. 또 뭐라도 써두면 "이 부분 좋아요" 라거나, "여기는 이러이러하게 고쳐보면 어떨까요?" 등 피드백을 하면서 다듬는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단 쓰세요"는 오늘의 나에게 종일 세뇌한 말이기도 하다. 으, 안 써지니까 쓰기 싫다! 쓰기 싫으니까 안 써진다! 의 악순환의 고리를 겨우 끊어내고 일단 써 내려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