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가족

나는 셋째딸

by 파도타기

2년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리에 순간 멍했고, 나는 못 들은 체했다. 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그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몇 년 동안 나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2년 동안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면서 한 질문이었다.

유학을 가게 되어 마음이 흔들렸을까?


단 한번 긍정적인 말을 들었다. 안방에서 같이 TV를 보고 있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 장면이었는데, 내가 다들 너무 예쁘지 않냐고 했더니,


수진 씨도 꾸미면 더 예뻐. 다 꾸며서 그래.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나도 꾸미면 예쁠까? 하는 마음과 그가 나를 예쁘게 보고 있구나 했다.


종로영업소로 발령이 난 후 보험외판원이었던 그의 어머니 차여사를 만났다. 차여사는 대단한 인맥을 자랑했다. 그 인맥에 특유의 친절함과 강한 생활력으로 영업실적이 매우 우수했다.


우리 엄마보다 일곱 살가량 위인데 대구에서 명문여고를 졸업했고, 여러 자매들이 모두 고졸이상의 학력을 지닌 대구 부잣집 명문가 딸이었다.

남편은 육사출신 군인이었는데 6.25 때는 박정희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중령 근무 당시 중풍이 와서 예편하고 집에서 있었고, 차여사는 그때부터 보험외판원으로 실질적 가장이 되어 두 딸과 두 아들을 키웠다. 또 바로 아래 여동생은 5 공의 주역 중 한 사람의 부인이다. 자매들은 캐나다에도 살고, 대구에도 살고 있으며 일본에도 누가 있었는지 종종 일본 손님이 오기도 했다.


차여사가 내게 아들이야기를 했다. 육사생도인데, 이번 축제에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대학생들은 오월 축제를 한다는데,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축제에 참여한다는 데에 설렜고 흥분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우이동 차여사댁에 드나들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가서 잠을 자고 일요일에 최여사 교회를 갔다. 차여사는 그 교회 권사였고, 나는 중등부 교사를 했다.

차여사는 나를 '우리 셋째 딸'이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나는 그 집의 셋째 딸이 되었다.

나는 두 번째 가족을 만난 것이고, 그 가족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회사는 월말이면 마감을 하는데 밤늦게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밤 10시 이후에 주로 퇴근하지만 때로는 새벽에 끝날 때도 있었다.

월 마감 때마다 나는 자취방이 아닌 우이동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에 타자마자 축 늘어져서 꼼짝 않는 나를 보고 기사는 나의 직업을 의심할지도 모르겠다면서 웃었다. 새벽에 퇴근하는 직업.. 누구겠는가?


우이동에 내가 쓰러지듯 들어가면 고2 남동생은 작은 빈방에 나를 부축하여 눕히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수건으로 손과 발을 아주었다. 성서 속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내가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기 방으로 다.


나는 저혈압이 심했는데, 영양실조까지 겹쳐서 고등학교 시절에도 조회시간에 종종 쓰러졌다.

내 친구는 조회시간마다 교장 훈화를 듣지 않고 나만 지켜보다가 쓰러짐과 동시에 뛰어와 양호실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재빨리 물수건으로 하얗게 늘어진 손과 발, 얼굴을 닦아준다. 그리고 침대에 쉬고 나면 정신이 들고 교실로 함께 들어왔다.


친구대신 고2 그의 남동생이 똑같이 나를 보살폈다.

남동생이 고3이 되었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입 입시를 준비했다. 그래서 남동생과, 그의 이종사촌인 5공 주역의 아들이 같이 공부했고, 이종사촌이 내게 수학을 가르쳤다. 나는 이 집에서 3개월을 머물면서 학원을 다녔다. 수능 성적은 생각보다 아주 잘 나왔다. 그러나 내가 가고자 하는 S교대 점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포기하고 제천 집으로 갔다.


가족들은 내가 갈 때마다 따스하게 반겼다.

미스김 서 와라, 밥 먹자

차여사는 딸이라면서 늘 미스김이라 불렀다.

또 나보다 두 살 위 언니는 '수진 씨 왔네' 하고 웃으면서 어서 밥 먹자고 하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옆집 도우미 아주머니도 셋째 딸로 나를 친절하게 대했다.


이 집엔 그 누구도 소리 지르고, 싸우고, 나무라고, 울고 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친절하고 밝고 평화롭다.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원한 바로 그런 가족상이었다.


나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 이렇게 셋째 딸로 살았고, 그와는 휴가 나왔을 때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일상을 자연스럽게 다른 가족과 다름없이 지냈다. 나는 진심으로 이 가족의 셋째 딸이고 싶었다.


한번 교회를 둘이 같이 간 적이 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가 눈을 감고 있다. 왜 그러냐고 하니, 하나님의 성전인 몸이 더러운 세상을 보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커피도 마시지 않으며 우유만 먹는단다.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충격이었다.

아무리 신실한 기독교인 이라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양어머니로 소개하는 차여사는 종종 나를 경계했다. 내가 혹시라도 며느리 자리를 탐할까 걱정이었나 보다. 보석 반지를 보여주면서 이건 큰며느리한테 물려줄 거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넌 아니야, 군침도 흘리지 마, '하는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아는 교포가 있는데 엄청 부자다. 다만 장애가 있어서 걷지 못한다. 거기로 시집갈래?


내가 들은 가장 치욕적인 말이었고, 끝내 상처로 남았다. 장애 비하가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여자의 결합 조건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럴까요?' 하면서 농담으로 응대했다.

그 후에도 자꾸 누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에게 한번 살짝 흔들린 적이 있었다.

처음 본 그는 꼭 어린 왕자 같았다.
말끔한 외모, 제복이 잘 어울리는 각진 어깨에 예의 바르고 조용한 음성이 내가 전혀 접하지 못한 남자였다.

육사생도는 제복을 입고 중국집에는 갈 수 없단다. 웃음이 나왔다. 참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경양식 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었고, 회사원으로 돈을 벌고 있는 내가 비용을 지불했다.

그렇게 만나 육사 축제에 갔고,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는 나를 부드럽게 리드하며 춤을 췄다. 기독교 신자로서 선량한 그는 매 순간 배려했다.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보살핌이었다.


그래서 는 그와 결혼한다면 어떨지 상상을 했고 절대 불가능하다 결론지었다. 그는 하얀 백지 같았다.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도덕군자 같았다.

그런 반면에 나는 총천연색으로 얼룩 죄인 같았다.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형벌이다.

나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밥하고 빨래하러 결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


에게 그는 그냥 또 하나의 가족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양어머니는 셋째 딸에게 가난한 너는 일본 부자 장애인한테 시집가야 마땅하다는 것인가? 언감생심 내 아들은 넘보지 말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성애가 만든 실언이겠지.


나의 반항은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나는 당신의 며느리 절대 안 합니다.

본사 계장이 후배를 소개해주어 소개팅도 했는데 소개팅 이후 한 달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 마침 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옆사무소 남자와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양어머니 차여사는 신나서 그에게 말했다.

"미스김 요즘 연애한다."

그는 아무 표정이 없다.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스김 회사 그만뒀다. 그리고 제주도에 있는 애인한테 다녀왔다. "


나의 첫사랑이 제주도 영업소장으로 발령 났고, 나는 그해 8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를 다녀온 것이다.

역시 그는 아무 표정 변화가 없다. 축하한다거나 제주도여행은 어떠했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2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론 나의 첫사랑은 끝났고, 나는 교대에 입학하여 여전히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교회교사도 하고 셋째 딸로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나의 침묵은 2년 후 그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비로소 답했다. 신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남편을 소개했다.

양어머니는 반갑게 맞이했고 가족들은 축하했지만,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눈 채, 방으로 들어가 육사 교수인 매형과 컴퓨터 이야기만 했다.

훗날 남편은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자신을 무시한 것 같다고 하면서 서운함을 말했다.


양 머머니는 셋째 딸 결혼예물로 18k반지를 신랑신부 두 사람에게 선물했다. 그것이 내가 결혼하면서 받은 유일한 예물이다.

나를 경계한 것이 미안했을까? 니면, 이제야 진짜 셋째 딸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본의 부유한 장애인 대신, 도덕군자처럼 완벽해 보이는 어린 왕자 대신, 나를 가장 필요로 하면서 나를 왕비처럼 소중히 여겨줄 가난한 신학생을 택했다.


그리고 결혼 후 9년 동안 우이동을 찾지 않았다.

양어머니가 암으로 누워계신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꿀단지를 들고 찾아갔다.


아무도 못 알아보셔.

언니가 말했지만,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울었고, 양어머니 눈에서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손을 잡자 손에 힘을 주어 꼭 잡는다.


그의 옆에는 아내가 함께 있었다.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해서 모시고 계셨을까?
그의 아내는 아름다웠고 품이 느껴졌다. 장군의 딸이라고 했다.
그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정말 좋은 배우자를 만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나의 두 번째 가족은 따스하고 친절했다.
내가 누리지 못했던, 진짜 가족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평생 감사하며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분들이 모두 축복받기를, 그리고 나에게 베풀어 준 친절에 대한 보답을 자손들이 넉넉히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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