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Coming out). 사전적 정의는 동성애자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블밍아웃이 어떤 뜻인지 바로 와닿지 않는가? 블밍아웃이란 블로거가 자신이 블로거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 이 글은 블밍아웃에 관한 나의 생각이다.
비밀일기장인 듯, 비밀일기장 아닌, 비밀일기장 같은 것
하루에 두세 개씩 포스팅을 해도 늘 일감이 많이 밀려 있던 20대의 난,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블로그를 알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물론 블로그 기반의 대외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블로그를 공유하고 함께 소통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외엔 굳이, 내가, 먼저, 내 블로그를 꺼내 보여주지 않았고 가급적 알려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숨기려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블밍아웃 '당한' 순간도 있다.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나의 블로그를 발견한 지인들도 있었고, 내 블로그를 이미 알고 있던 지인이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일인 양 떠벌리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블로그를 보게 된 게 남에게 일기장을 들킨 것 같은 일이라고? 그럴 거면 비밀 일기장에나 쓰지 왜 공개적인 곳에 올려놓고 그렇게 숨기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블로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고, 공감하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내 블로그가, 블로그를 하는 내가, 남들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싫었다.
어쨌든 굳이 주변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사사로운 부분을 들킨다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갖가지 이유가 더해지며 블로그를 주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더욱 굳건해졌고 점점 더 필사적으로 감추게 되었다.
물론 모든 블로거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저 남들의 작은 행동, 말투, 표정 하나하나 모두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한 INFJ형 인간이, 왜 그동안 속시원히 블밍아웃 하지 못했는지 기억을 끄집어보고 싶다. 즉, 내가 상처받은 순간순간을 꺼내 기록해 보겠다는 얘기다.
앞에선 웃고 뒤에선 비아냥거리는 거 다 알아
앞서 언급했듯 블로그를 기반으로 형성된 네트워크 안에서는 나의 블로그를 보여주는 것이 전혀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이라면 블로그에 관해서는 당연히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겠지.'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밀린 포스팅을 하고 있던 늦은 밤, 블로그 댓글 알림이 울렸다. 같은 대외활동에서 만났지만 팀도 다르고 무언가 친해지기 어려운 친구였다. '어? 이 친구가 나한테 댓글을 남겼네?'하며, 한편으론 이 친구와도 조금 더 가까워질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기쁜 마음으로, 댓글 창을 눌렀다.
[와 OO헤어에서 협찬받았네, 여기서 머리 하려면 원래 얼마야? 엄청 비쌀 텐데 돈 벌었네~]
미용실 후기 포스팅에 달린 댓글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해 내진 못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문자 그대로는 전혀 나쁜 의도를 찾아볼 수 없지만 왜였을까,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진짜로 궁금해서? 아니면 신기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조금만 검색해봐도 금액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또,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나보다 방문자수가 더 많거나, 협찬이 더 활발한 사람도 있었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 마음을 꾹 누르고 대댓글을 작성했다.
[OO이도 체험단 신청 한 번 해봐~ OO 이는 얼굴도 예쁘니까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은데!]
정말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먼저 한 발 내민 것이라면, 한 번 더 댓글이 달리거나 그 뒤로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댓글 한 개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친구와의 소통은 끝이 났다.
물론 같은 대외활동을 했다고 해서 취업의 방향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블로그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 여겼던 존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건, 왠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다. 그 뒤로 약간 의심병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저 사람한테 내 블로그 알려주면 앞에서는 부럽다 얘기해도, 뒤에선 비아냥 거리는 거 아니야?' 하고 말이다.
친구들과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네 블로그 보여주면 뭐라도 하나 더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너 블로거라고 얘기해봐!'라는 농담 섞인 말도 사실은 비아냥 섞인 조롱이었을까.
'블로거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
'블로거지'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한 블로거가 식당에 가서 자신이 파워블로거인데 후기를 남겨줄 테니 음식값을 무료로 해달라고 했다는 썰에서 나온 말이다. 그 사건은 기사화되면서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블로거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블로거지'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폭력적으로 다가왔고, 입에 담기조차 버거웠다. 단지 단어 뒤에 '지'라는 한 글자 추가되었을 뿐인데,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블로거'라는 단어조차 원래 '블로거지'라는 단어에서 한 글자 빠진 것 같아 낯설게 느껴졌다.
무료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고 대가성 후기를 작성해 주는 일은 지금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체험단 플랫폼을 통해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선정하는 경우도 있고, 업체가 직접 블로거에게 연락해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몰랐는데 온라인 사업의 경우 역으로 업체에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업체와 블로거 쌍방의 합의하에 진행되는 게 일반적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뷰를 보는 입장에서는 이게 광고인지, 광고가 아닌지는 알 권리가 있다. 온라인 광고에도 무조건 광고 표시가 붙지 않는가. 아무튼 '블로거지' 사건 이후로 블로그 체험단이나 협찬에 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라, 체험 글 하단에 공정위 문구 삽입이라는 권고사항이 생겼다. 이렇게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불법도 아닐뿐더러 정당한 광고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문제는 업체가 블로거를 모집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거길 가서 으름장 내놓듯 이야길 하고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행태에 대해서는 나도 당연히 함께 분노했다. 블로'거지'라고 욕을 먹어 마땅하다. 그런데 신조어 하나에서 시작된 대중의 시선은 점점 블로거 전체에 대한 혐오로 조장되는 듯 보였다. 실제로 '누가 먼저 요구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료로 제공받으면 다 블로거지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런 시선들 속에, 나는 또 숨어 들어갔다.
우린 블로그 체험단 '같은 거' 안 해요.
내가 주로 활동하던 분야는 뷰티와 맛집이었는데, 아무리 체험단, 협찬을 밥 먹듯이 받는다고 해도 내 돈을 1원도 안 쓰며 산 건 아니었다. 자취생이라 당연히 대부분의 식생활은 내 돈을 지불하고 사 먹었고, 한창 예쁘게 꾸미는 것에 관심 많던 20대 초중반 시절이라 얼마 안 되는 인턴사원 월급으로 피부관리실, 네일숍도 참 열심히 다녔다.
처음 사회생활을 했던 회사는 (이젠 아주 넘사벽 회사가 되어버린) 소셜 커머스 회사였는데, 당시 리테일 회사로의 과도기로서 아직까지는 맛집, 뷰티, 공연 등과 같은 지역딜이 활성화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면서 당연히 관심 분야인 뷰티숍 딜에 자주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플랫폼을 통해 티켓을 구매해 퇴근 후 근처의 네일숍, 피부관리실에 좋은 금액으로 아주 신나게 케어를 받으러 다녔다.
블로거로 방문하면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지라 마냥 힐링하는 시간만은 아닌데,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직접 번 돈으로 뷰티숍의 고객이 되어 보니 사람들이 왜 뷰티숍 가는 시간을 '힐링 타임'이라고 얘기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날도 회사에서 지역 딜을 구경하다가, 회사 근처의 네일숍 티켓을 구매해 들뜬 마음으로 방문한 날이었다. 케어와 풀 컬러 젤 네일까지 해서 소셜커머스 가격 2만 원대로 매우 저렴한 만큼, 샵은 매우 바빠 보였다. 내 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자, 나를 담당해주는 직원분이 빠르게 케어를 시작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어디서 받았는지, 어떤 종류의 제품을 썼는지, 이것도 해봤니 저것도 해봤니 하는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또래에 비해 뷰티숍 경험이 많다고 해도 지금보다 8년 전인 그때는 아직 시술 과정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던 시기였다. 내가 내 손에 받은 네일 케어 제품의 종류까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요즘에는 많이 줄었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샵에 방문하면 괜히 이전에 시술한 타샵을 깎아내리는 듯한 분위기가 많았던지라 물어보는 족족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 세례를 받다가, "저는 평소 블로그 활동을 하는데, 주로 뷰티숍은 체험단이나 협찬으로 받아요. 지난번 네일도 체험단으로 받았던 거라 사실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냥 이게 사실이라, 내가 갖고 있는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돌아온 말은 내가 생각한 대화의 주고받는 구조를 완전히 빗겨 난 말이었다.
"저흰 블로그 체험단 같은 거 안 해요."
내가 블로그 체험단 하라고 부추긴 것도 아니고, 내가 블로거니 시술을 공짜로 해달라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대답이 나왔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아무튼 그 순간부터 네일숍 직원의 태도는 까칠 그 자체로 돌변했다. 내 손을 쥐고 케어를 해주면서 어떤 짓(?)을 할지 두려울 정도로. 괜히 툴툴 대고 짜증 가득한 손길로 케어를 하길래 참다못해 소심한 내가 한 마디 했다.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이제까지 괜히 까칠하게 대했던 게 민망했는지 그제야 직원은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씁쓸한 기분으로 시술을 마치고 나왔다. 그 후 다른 피부관리실에 가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블로거라고 갑질을 시전 한 것도 아니고 뷰티숍을 좋아하는 한 블로거가 평소 자기 돈을 주고도 숍을 이용하러 갔을 뿐인데, 정당하게 내 돈 주고 매장을 이용하러 간 손님이 그냥 블로거였을 뿐인데... 내가 블로거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렇게 타인으로부터 날 선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블밍 아웃'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짐, 또 다짐했다.
커밍아웃에서 변형된 신조어 블밍아웃. 신조어라고 하기엔 블로거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으니 블로거들 사이의 은어쯤 되려나. 물론 모든 블로거가 블밍아웃을 꺼리지는 않을 거다.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자랑스레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엔 거리낌 없이 얘기했더라도 나처럼 점점 입을 닫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
그런데 아직까지의 사회통념 상 커밍아웃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블밍아웃'이라는 단어의 기저에는 무언가 숨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깔려 있다. 그리고 블밍아웃이라는 표현이 블로거들 사이에 적지 않게 쓰인 것을 보면 비단 나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은 회사에서 직접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하고, 체험단을 꾸려 우리의 상품을 홍보하는 일을 업으로 살고 있다 보니 이전보단 부담이 조금 줄었다. '내가 이 일로 밥도 벌어먹고 사는데, 얘기 못할 건 뭐야?'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사실은 예전만큼 블로그를 활발하게 안 하니까 조금 내려놓은 것도 있다. 누가 물어보면 '블로그 하긴 하는데요, 방문자수도 잘 안 나오고 글도 한 달에 몇 개 올릴까 말 까예요.'라고 쿨하게 대답해버리는 것이다.
글을 쓰고 보니 내가 블밍아웃 하지 못했던 이유는 대부분 체험단, 협찬에서 발생된 콤플렉스였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블로거들이 블밍아웃 하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광고 협찬(앞 광고)이 빈번히 이루어지다 보니 '무상 제공 후기'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다. 내가 블로그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