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에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실상 여타 다른 SNS의 '팔로워'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쩌면 네이버(NAVER)의 발음이 이웃(neighbor)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언어유희적으로 착안되었는지도 모를, 네이버 블로그 만의 독특한 관계 맺기 시스템이랄까.
개인적으로 요즘에는 블로그를 함에 있어서 이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독고다이, 마이웨이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서로 이웃'을 신청한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진짜 더 보고 싶은 블로그를 발견하면 나 혼자 '이웃 추가'만 하고 조용히 새 글을 받아보는 정도. 내게 서로 이웃 신청이 들어와도 아무 느낌도 감정도 없이 미뤄두기 일쑤다. 그러다 마치 밀린 결재 문서를 처리하듯 한 번에 다 수락해 버리는 것.
하지만 내게도 블로그 이웃이 진짜 이웃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주고받는 댓글 몇 번이면 '애정 이웃'이 되고 언니, 오빠, 친구 하며 진심으로 내 감정과 에너지를 쏟았더랬지. 어쩌면 대학교에서 소위 '아싸'로 지내며 마음 나눌 친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실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롤러코스터 타는 내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
블로그 이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이 단지 나 혼자만의 변화인지, 아니면 블로그 세계 전반적인 트렌드인지는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누군가는 이웃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오프라인에서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쓸쓸해진다. 어떻게 그때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나이 불문하고 온라인상에서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아무튼 오늘은 블로그에 관한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내 소중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나보다 더 사람에 진심인 그녀, R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조금은 괴짜 같았다. 연예인만큼이나 화려하고 예쁜 이목구비를 가졌는데, 글에 올라온 사진들은 온갖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쁜 얼굴 그렇게 쓸 거면 저 주세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 정도(ㅋㅋ). 뷰티 블로그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소통하다가, 그녀를 통해 한 피부관리실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이를 매개로 오프라인에서도 그녀를 실제로 보았다. 작은 키 하면 나도 빠지지 않는데, 나보다 더 아담한 체구와 애교 가득한 말투, 빙구 웃음이 같은 여자가 봐도 참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파워 I 인 나는 그 뒤로 붙임성 있게 오프라인 만남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저 내적 친밀감만 가득한 채 온라인상에서의 소통만 이어갔다. 그렇게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게 된 날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 의지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한 패션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하게 된 당시, 오프라인 스토어 오픈 소식을 홍보해 줄 셀럽 혹은 파워블로거를 모집해야 했다. 지금이야 그 정도는(과장 조금 보태면) 일도 아닌 정도지만, 당시 모든 것이 처음이던 나였다. 업무에 관한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맨 땅에 헤딩하듯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본 몇 백씩 하던 대행사의 견적과, 한 명 한 명 직접 컨택해도 절대 돌아오지 않는 답변에 나는 꽤나 절망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떠올랐다. 어떤 일이든 두 팔 걷어붙이고 진심을 담아 홍보하던 그녀였다. 역시나 나의 제안에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그렇게 오픈 행사 당일, 그녀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매장 오픈을 축하한다며 나를 위한 꽃다발을 준비했다는 그녀.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 사업장도 아니고 나는 그저 회사의 일개 말단 인턴사원일 뿐인데. 현장에는 매장 오픈을 위해 나보다 더 굵직굵직한 중요 업무들을 척척 해내고 고생한 선배 직원들이 있는데. 그분들 앞에 내가 뭐라도 된 듯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들어간다니, 아찔했다.
가까스로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먼저 만났다. 와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카페 카운터에 꽃을 맡겼다. 그리고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오픈 행사가 끝나고, 맡겨둔 꽃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한껏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풀고, 하나하나 잔가지들을 정리해 꽃병에 고이 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업무,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였는데 당시 나는 엄청난 무기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각자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바삐 달리고 있는데 나만 멈춰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맞나? 잘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는데, 그저 블로그 하나만 믿고 나댄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혐오에 빠져, 다 내려두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매장 오픈 행사를 끝으로, 나는 회사와의 협의하에 근로 계약을 연장(연장해도 계약직) 하지 않았다. 환상 가득했던 회사에 대해, 제대로 알려 주는 것 없이 성과만 닦달하던 선배 직원들에 대해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때 나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 말해주고 토닥여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저는 그저 인턴 나부랭이일 뿐이에요.'라고 얘기하는 내게 '그럼에도 고생했다.' 말해주던 그녀.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고마웠다 말하고 싶다.
S, 너는 내가 지난겨울에 한 일을 알고 있지?
S와는 그렇게 친밀한 소통을 이어온 관계는 아니었다. S도 나 못지않게, 혹은 나보다 더 활발히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이웃들과 소통은 거의 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블로그 세계를 착실히 일구어 나가는 쪽이었다. 그렇기에 나와 비밀 댓글로 사담을 나누는 일이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그녀를 떠올리게 될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여느 때처럼 블로그를 둘러보다, S의 블로그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살고 있는 집과 같은 건물 같았다. 글의 내용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취업한 그녀가 얼마 전 자취방을 구해 이사를 하고, 한창 집 꾸미기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 망설이다 조심스레 댓글을 달았다.
'S님 혹시... 신림동 OOO 건물로 이사 오셨어요?'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는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건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심지어 같은 층,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현관을 바로 마주 보는 호실이었다. 세상 참 좁다. 신기했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던 S와 동네 친구가 되고 싶다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쓰디쓴 이별의 아픔을 겪은 시기였다. 10대 시절의 철없는 소꿉장난 같던(물론 모든 10대들의 연애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10대 시절의 연애가 그랬다는 얘기다.) 연애 말고, 진짜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했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내 입장에선 납득할 수 없는 생이별이었고,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던 고통이었다. 울고 불며 매달리고, 하나부터 백까지 내가 들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들며 처절하게 그를 붙잡았다. 바로 그 집 현관 앞에서.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그녀는 들었을까?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일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원룸 건물에서 소음 공해를 일으켰다는 민망함도 함께. 그녀는 원래 이웃들과 소통을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왠지 나도 더 이상 그녀에게만큼은 스스럼없이 댓글을 달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자주 가던 집 근처 단골 커피숍에서 그녀를 마주치기도 했다. 블로그 글만 보면 세상 조용할 것만 같았는데, 실제로는 활발하게 재잘대는 그녀였다. 예쁘게도 집을 꾸몄던 그녀는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이후 몇 번의 이사를 거쳤다.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온라인 사업에 도전했을 때, 그녀에게 블로그 포스팅을 의뢰하기 위해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뒤였다.
R과 S 외에도 블로그라는 공간을 통해 길게든, 짧게든 나와 연을 맺은 이웃 블로거는 많다. 블로그 이벤트를 열어 직접 택배로 선물과 손 편지를 주고받은 이웃도 있었고, 인스타그램까지 관계를 이어와 댓글로 친분을 쌓았던 이웃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그들을 대한다고 해서 모두가 나를 같은 진심으로 대한 건 아니었다. 내가 공들여 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글의 제목과 사진 몇 장만 휘리릭 대충 넘겨 본 채 글과는 완전 다른 논지의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 점점 질려갔다. 물론 서로 진심으로 통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 없이 블로그를 폐쇄하고 잠적해버린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취직을 하며 점점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일이 줄어들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내가 갑자기 블로그를 접어 버렸다고 느꼈겠지.
어쨌든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블로그 이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웹상에서 이어진 인연은 딱 거기까지구나, 생각하고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았다.어쩌면 나 자신에게 지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나한테 조금만 잘해줘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상대가 자신의 30퍼센트를 보여주면 내 모든 패를 다 까서 보여주고, 이내 그 사람이 도망가버리면 혼자 상처받고 우울해하는 미련한 나 자신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믿어버리는 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렇게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