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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예지 Oct 24. 2022

세 자매

어렸을 적부터 언니나 오빠가 있는 삶을 동경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첫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 자매 중 첫째. 둘째 동생과는 또래이고 막냇동생이랑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희한하게 친한 친구들도 거의 맏이다. 비슷한 류의 인간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걸 까. 가끔 언니나 오빠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관련된 그들의 삶을 묻는다. 돌아오는 것은 십중팔구 심드렁한 대답이다. 하긴, 나도 동생이 있는 삶을 누군가 물어오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곤 했다.


셋이 함께한 여행은 처음이었다. 둘째 동생과는 여러 번 여행을 다녔지만 다 같이 가는 것도, 막내 동생과의 여행도 처음이었다. 난 요즘 한창 막내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었고, 아직도 걔를 잘 몰랐다. 이 여행은 그런 나에게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친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셋은 꽤나 막역한 사이였다. 막내 동생에게 잔소리를 더럽게 많이 하긴 해도, 그래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도 우리 세 자매의 우애를 지켜내는 일은 내가 아주 중히 여기는 일이니,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


자매라면 남들은 모르는, 그 들만의 웃김 포인트가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 같은 것 말이다. 그 단어는 진하게 엮인 우리만의 암호가 되고, 그 암호를 해독하는 순간 눈물이 다 날 만큼 한참을 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숙소에서 수다와 장난이 가득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한 뒤 또다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카페인과 당을 해결하기로 했다. 둘째 동생과는 이전에 한 번 가보았던 곳이었다. 그곳으로 가다 보면 커다란 연못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는 또다시 필연적으로 그곳에 들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커다란 연못의 탁 트인 전경과 하염없이 반짝거리고 있는 윤슬과 우아하게 흔들리고 있는 초록과 파랑 때문에. 짧게 줄인다면 무척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까이 다가서 보면,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놀이터만 시끌벅적이다. 저번에 못 탔던 집라인이 보였다. 집라인의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놀이터 인생에 그네가 온고지신 중 “온고”의 최고봉이라면, 집라인은 “지신”의 최고봉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기회가 찾아온 듯했다. 드디어 저 놀이터의 집라인을 정복할 기회. 오랜만의 조우에 약간 주춤거리고 있던 내게 핑크색 옷을 입은 다음 순서의 귀여운 여자애가 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비명을 질러대며 신문물을 즐긴 뒤, 그 애가 조심히 그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도록 꼭 잡아주었다. 사실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꼬질꼬질한 핑크색 츄리닝이,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묶은 머리가 그 증거였다. 게다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조리 씩씩했다. 이 놀이터의 실세 같은 느낌. 그냥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맘이었다.


맏언니의 집라인 정복기를 조용히 기다려준 동생들과 연못을 훤히 볼 수 있는 정자로 올라왔다. 멋지다, 대박이다와 같은 1차원 적인 감탄사들만을 남발하고 있던 그때, 아까 그 핑크 여자애가 자기보다도 더 작은 꼬맹이와 함께 정자로 올라왔다. 그 핑크 여자애의 이름은 세아였다. 같이 온 꼬맹이의 이름은 유주라는 것도 빼먹지 않고 소개했다. 저기 아래에 그네 언저리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단발머리 아기의 이름도 소개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방금 소개한 작은 아이들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려주었다. 세아는 아까 집라인에서 만난 우리와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주는 그런 언니를 그저 졸졸 따라온 것 같았다. 대환영이었다. 순수하고 씩씩하고 게다가 귀엽기까지 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일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건 걔네도 세 자매라는 것이었다. 공통점까지 발견했으니 친해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세아: 신기한 거 말해줄까요?

나: 뭔데?

세아: 저희 셋 다 이름이 “안”으로 시작해요.

나: 우리 돈데! 우리는 다 “전”으로 시작해.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아가 애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둘째 동생은 유주를 애틋하게 보기 시작했고, 막내 동생은 저 멀리 있는 단발머리 아기를 바라보며 킬킬댔다. 조그만 세 자매는 바로 옆의 훌쩍 커버린 세 자매와 꼭 닮아 있었다. 언니를 너무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귀염성이 다분한 껌 딱지 유주와, 핑크색 옷을 입고 씩씩하고 수줍은 언어와 행동을 뽐내는 세아, 언니들은 어떻든 나는 내 길이나 가련다! 하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저 멀리의 막내까지.



지금 여기의 커다란 세 자매를 보곤 꼭 우리처럼 자신들을 겹쳐 볼 세 자매들이 초록과 파랑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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