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매서운 바람을 많이 맞았다. 주말에 친구들과 집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나섰을 때는 그 매서운 바람이 자꾸만 나를 향해 정면으로 불어와 얼굴을 쳐대니까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걸어서 20분 거리였으니 평소처럼 걸어갔던 건데 너무 호기로웠다. 바깥에 한 발짝 내딛자마자 조금 전의 호기를 후회했다. 그리고 걸으면서는 더더욱. 오늘은 또 다른 볼일을 보러 나섰는데 드문드문 녹지 않은 흰 눈이 보였다. 밤새 눈이 꽤 왔었나 보다. 아무래도 눈이 올 만한 추위기는 했다.
이런 추위에 난데없이 거울 앞에서 수영복을 입어보고 있다. 며칠 전 주문해 둔 얇은 나일론 소재의 반바지가 도착해서 입어보는 김이었다. 온몸에 오돌토돌 닭살이 돋았다. 코도 훌쩍거렸다. 묵혀 둔 여름옷을 꺼내 놓고 보니 지난여름의 나는 뭘 입고 다녔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옷 정리를 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다. 겨울옷을 넣어야 할 몇 달 뒤에도 똑같이 그러고 있을 게 빤하다.
지금과는 정반대 계절의 옷가지를 널브러뜨려 놓고 있는 건, 곧 여름 나라로의 여행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표는 떠나기 2주도 안 남은 시점에 구매했다. 그렇지 않아도 짐 싸기와 같은 일련의 여행 준비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라 빨리 해치워 버리거나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뤄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여행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빠르게 해치워내야 할 일뿐이었다. 숙소 예약, 환전과 같은 여행과 관련된 일 외에 일상적인 일들까지도 다분했다.
대략 이 시기에 여행을 가겠거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최종 후보지는 두 곳이었다. 런던과 멜버른. 하지만 두 곳 중 어느 곳에도 가지 않기로 한 이유는 이러했다. 우선, 시기가 시기인 만큼 비행기 표가 너무 비쌌다. 그런데 숙소까지 비쌌다. 더 빨리 예매하지 못했던 건 독립하느라 이래저래 돈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20대 초중반의 나라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런던 혹은 멜버른행 비행기 표를 결제했을 거다. 현재의 나는 두 손으로 머리까지 감싼 채 열렬히 고민 중이지만. 씁쓸했다. 아직은 내 삶에서 여행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은데. 오랜만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 만큼 꿈꿨던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여행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은 나와 달라져 버린 씁쓸한 나까지 챙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옆에 있던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해제하여 네이버 검색창에 이 시기에 여행 가면 좋을 곳을 검색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비교적 짐을 가볍게 꾸릴 수 있는 따뜻한 도시이길 바라면서. 영국과 호주의 도시가 보일 때는 더 아쉬워지기 전에 재빨리 스크롤을 내려야 했다. 어쩐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추천 장소들 사이로 내 눈에 들어온 건 태국이었다. 곧바로 떠오르는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곳의 분위기가 잔뜩 담긴 사진을 보고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던 도시. 치앙마이였다.
돌이켜보면, 동남아시아 쪽은 자유로이 여행해 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 봉사활동으로 갔거나 짧았던 패키지여행이 다였다. 그렇지만 난 그때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다고 처음으로 다짐했었다. 함께 했던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봤던 풍경이 기막혔기 때문이다. 내 행복을 말하고 너의 행복을 물으면서.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통하는 것이 많은 친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을 알고 좋은 점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더위와 뜨거운 햇볕에 예민한 내 몸은 여름이 되면 괴롭지만, 여름이 내게 준 건 비단 괴로움만이 아니었다. 꽤 오래 따라갈 이정표 그리고 인연까지 선물했다. 다시 사계절이 여름인 나라를 여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진 한 장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치앙마이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혼자서 외국은 오랜만이라 조금 무섭다. 그런데 내가 머무는 동안의 일기 예보가, 알고리즘이 자꾸 보여주는 그곳의 분위기가 이 선택을 기대하게 한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고 그러길 고대하고 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인데. 그러다 이내 마음껏 기대하기로 한다. 실망이 찾아와도 글로 써버리면 될 테니. 런던과 멜버른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치앙마이에 있는 내 모습만 그리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