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오분의 일쯤 흐려지는 일과 눈이 미치도록 간지러워지는 일이 시작될 때쯤 예감하고 만다. 바야흐로 여름이 몸속 깊이 당도했구나. 한껏 붉어진 두 눈은 여름이 들어섰다는 나만의 고통스러운 증거이다. 그런 이유로 몇 년째 여름에만 안과를 방문하고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내 눈에 무슨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지만, 정확히 무슨 알레르기인지는 말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냥 나 혼자서 햇빛이나 온도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여름의 시작을 병원에서 여는 사람답게 또 한 가지 반복적으로 앓는 것이 있다. 그곳에 서 있는 나는 신기하리만치 같은 시점에 무기력을 앓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실을 올여름이 되어서야 깨닫고 말았다. 몇 년째 이 시점의 나는 같은 모습으로 한껏 늘어진 채 숨만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둔하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약간의 천하무적 기운이 내 주위를 맴돈다. 같은 시점에 앓는 무기력을 깨우쳤다면 내년 봄의 말미에 서 있는 내가 대비를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불현듯 또 다른 깨달음이 뇌리를 스친다. 그걸 아는 지금도 무기력에서 벗어날 기력을 내려하지 않고 있고,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둥둥 떠 실제보다도 더 실제 같이 보이지 않느냐고. 머리는 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니 움직이라고 말을 건네고, 마음은 불안의 신호를 온통 보내고 있는데, 몸은 몇 시간째 그 많은 부위 중 손가락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저 까딱거리고만 있는 나의 손가락. 옛날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텔레비전의 반의반도 안 되는 스마트폰이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처럼 너무 똑똑한 기계는 모르는 게 없어서 나를 힘들여 움직이지 않게 한다. 아, 정말 한결같고 싶지 않은 한결같음이다. 이렇게 애꿎은 대상만 탓하는 일도…
장마 기간이 도래하였다는 뉴스를 어렴풋이 들었다. 때마침 비가 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만 같은 하늘도 보였다. 그런데 희한하게 우산을 펼칠 일이 잘 없었다. 비가 내리는 시각이면 늘 실내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여름 나의 손목과 팔의 오금 사이에는 자주 우산이 걸려있었다. 그 부위에 벌겋게 남은 자국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확률을 따져본다면 들고 다니지 않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텐데, 모든 건 상상 속 내 모습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비를 마주했을 때 어떠한 당황의 기색도 없이 우산을 펼치는 내 모습. 당황하고 있는 타인의 구세주가 되어보는 하루도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급히 아무 편의점이나 뛰어 들어가 구석에 몇 개는 박아 놓을 우산을 사는 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준비된 자의 특권은 여유였다. 벌건 자국은 그 특권에 내가 더해진 촌스러운 징표였다.
준비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힘을 주어 말을 할 수 있다. 뭘 준비하기도 전에 마음이 너무 급해서 뛰쳐나가 버리는 사람에 가까웠다. 이게 나라서 어쩔 수는 없지만, 가지지 못한 것이라 그런지 준비력이 뛰어난 타인을 만나면 존경심이 일었다. 그의 꼼꼼함과 차분함에 반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간 여럿 반해왔던 전적이 조금은 그런 사람이 되는 데에 일조한 걸지도 몰랐다. 마냥 한결같지만도 않은 나를 하나 발견한 셈이었다. 같은 자리에 한참을 머물러 있던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종종 이토록 사소하다.
다음 날 새벽이면 뭐든 배송을 완료해 버리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한결같음을 끌어와 손가락만 까딱해서 말이다. 그런 다음엔 좀 더 여러 개의 손가락을 세밀하게 까딱거리며 초당 옥수수를 검색했다. 과거의 여름들이 올해 여름의 내게 부탁해 두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던 초당 옥수수를 먹어보는 일. 제철 음식을 챙겨 먹는 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계절을 부지런히 붙잡아 두는 일 같았다. 식재료에 힘을 쏟는 일은 어쩐지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선물하기 때문에, 옥수수를 베어 물 때마다 살짝 올라가 있을 어깨와 광대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초당 옥수수 5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무기력의 삶과 기력이 넘치는 삶 사이에 연결점이 되어 달라는 소망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