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면역자니 어쩌니 입을 놀린 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너의 가벼운 입놀림에 대한 대가라는 듯 보기 좋게 악명 높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만 것이다. 앞서 맞은 여러 차례의 백신에 한 번도 빠짐없이 아팠던 터라 막상 감염이 되면 좀 덜 아플 줄 알았으나 아주 알차게 아팠다고 한다.
뭔가를 삼켜낼 땐 왼쪽 귀까지 찌르르했다. 그 귀부터 목 안쪽까지는 꼭 찢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듯 하릴없이 나약한 모습이었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입맛이 전혀 없어 뭘 먹을 생각도 없는데, 침은 자꾸만 생겨났으니 말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불끈 쥐고 침을 삼켜냈다. 다시 한번 찌르르하게 귀까지 아파왔다. 그러자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이더니 그만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마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 하자 나도 모르게 입을 세게 다물어버렸다. 꼼꼼히도 아파하는 내 모습이 서러웠던 걸까. 이렇게 우는 나를 마주할 때면 흠칫 놀라다 이내 낯설어진다. 한 단어를 곱씹으면 그 단어가 생경해지는 것처럼, 놀란 사람은 낯선 자신의 행동을 곱씹다 눈물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날도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이라 구체적인 상황들이 모두 떠오르지는 않지만 아니, 상황이랄 게 없기도 했다. 분명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굵은 눈물 줄기들이 흘러내리는 걸 시작으로 몸이 흔들릴 만큼 소리 내어 울어버렸던 날. 쓰러질 만큼 되게 힘든 일도, 그렇다고 감격스러우리만큼 되게 기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기어이 두 소매를 다 적시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더랬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종종이라는 말도 좀 많은 것 같으니 “아주 가끔”이라는 말로 정정하겠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냉큼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지만, 정말 나의 일로 나오는 눈물은 결이 달랐다. 험난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누구나 그렇듯 우는 일로 모든 희망과 불만 사항을 표출하였을 테다. 조금 더 커서도 맘이 여린 건지 잘 울었던 것 같다. 정작 난 당사자도 아니면서 싸우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울고 있는 역할을 도맡았던 과거가 아직도 선연하다. 그런데 언제 눈동자가 이리도 메마른 사람으로 커버렸을까? 코로나에 걸렸을 때만 해도 그렇다. 터져 나오는 울음이니 뱉으면 그만인데, 버릇처럼 입 안으로 울음을 다시 욱여넣기 바빴다. 울 것 같은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울음을 참는 일이 해야 할 일 1순위로 급부상한다. 그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느라 조금 전 눈물의 이유는 가벼이 날아가버리고 만다.
물론,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감정을 수반해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많다. 이를테면 상대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행동을 마주했는데 그걸 이해시킬 수도 없을 때나, 운이 지지리도 없는 순간들이 질리도록 연속적일 때나, 필라테스를 하는 데 선생님께서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 같을 때도… 근래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진 않지만, 술을 넘어 감정에까지 취해버려 울어버리거나 울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인가. 지는 노을이나 떨어지는 꽃잎들, 비행기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세상을 바라볼 때도 마음은 울컥거렸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 이어진 눈물의 횟수는 비례하지 않았다. 감정만 실컷 차올리고는 김 빠지기 일쑤였다.
울고 나면 후련해진다. 단어의 뜻 그대로, 좋지 않았던 속이 풀려서 시원하다. 내 몸 안에 있던 독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그렇다면 우는 일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나는, 사람들은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걸 까. 꽤 유용한 해소 방법이라는 걸 깨달을 즈음이 되면, 울음은 어렸던 그 시절의 전유물이 되어버린다. 눈물을 곧잘 흘려 댔던 과거가 바로 직전이었음에도 살아온 세월만큼 단단해지지 못한 자신을 증명하는 행위라 여기는 사람처럼 군다. 우는 사람은 어쩌다 무른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눈물들이 달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