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스 Sep 26. 2023

여행을 가는 이유, 그 이유를 쓰는 이유

    삶 속 지점에 따라 여행을 가는 이유가 달랐다. 제대로 홀로 여행을 시작한 대학생 시절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동안 책에서만 보았거나 어디선가 듣기만 했던 도시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다. 돌이켜보면 그 여행들이 가장 충만하고 값졌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주로 답답함을 떨쳐버리려고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휴가를 내고 가는 여행)에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결국 해방감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이 여행들은 보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했다. 만족스러운 경우도 있었지만 후회도 남았다. 무엇보다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 해방감의 반작용이 강하게 닥쳐오곤 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꾸준히 여행을 떠나고, 꾸준히 그 여행에 이유를 단다. 한 번의 여행을 다녀오면 그 이유가 타당했는지 핑계에 불과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완전히 타당했거나 완전히 핑계에 불과했던 경우는 없다. 늘 서로 섞여있다. 다만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쏠렸는지는 분명하게 판단이 되곤 한다. 그 판단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여럽다. 나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하고, 또 속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세우는 여행의 이유는 언제나 타당하다. 때로는 매우 구체적이기도 하다. 성격상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지만 이유만큼은 꽤 구체적으로 설정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설정은 대개 충동적이다. 이 충동이 작동을 하면 휴가를 내고,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를 예약한다.

    이유는 여럿이다. 바다를 보며 혼자서 생각에 잠기고 싶거나, 내가 좋아하는 문화적인 어떤 부분을 더 뛰어난 도시에서 느껴보고 싶거나, 완전히 다른 기후를 겪어보고 싶거나, 변화를 꾸준히 지켜보기가 즐거운 도시를 꾸준히 지켜보거나, 차이를 느껴보고싶거나, 가능성을 느껴보고싶거나. 끝에 가서 핑계에 불과했구나, 싶은 이유도 처음에는 늘 진지하고 진심어리다.

    여행에 갈 때마다 공책을 들고가거나 여행지에서 공책을 하나 산다.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때그때 느낀 것들을 쓴다. 때로는 지하철에서,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술에 취해서 생각나는대로 끄적인다. 내용은 마구잡이다. 때로는 심각하고,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글씨가 엉망이라 나중에 다시 읽기도 힘들만큼 취한 글이다.

    최근 언젠가 지금까지 다녀왔던 여행들을 한 번 되도록 말끔하게 정리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이렇게 여행의 이유를 쓰는 이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